2월 20일에 인사동 갤러리손에서 계약을 마친 후 약 3개월 만에 개인전 준비가 얼추 마무리되었다. 2023년부터 꾸준히 그려왔던 <아드릐나라> 연작과, <꽃바다> 연작의 콜라보. 그림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화방넷에서 캔버스 사이즈별로 구입해 둔 아트패킹 은박패키지에 살포시 담았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심장이 두 방망이질 해댔다.
MBTI, J를 자랑하는 나는 5월 중순에 이미 운송 차량 예약을 해두었다. 그런데 업체에서 약속 하루 전날 연락이 왔다. "고객님, 주말에 상차를 하려니 기사님들 배차가 어렵네요. 금액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이런 시스템이라면 그리 일찍이 예약을 할 필요가 없었지 않나?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지만 전시 설치 하루 전이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추가 금액을 지불하기로 했다.
기사님은 토요일 밤에 도착하여 그림을 미리 탑차에 실어두고 일요일 오후에 갤러리로 운송해 주기로 하셨다. 그런데 기사님이 기존의 기사님들과 다르게 그림을 세워서 묶지 않고 차곡차곡 쌓는 것이 아닌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차마 말씀을 못 드리고 탑차를 보낸 후, 밤새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림이 눌리면 어떡하지? 나는 왜 내 작품을 위해서 그런 말조차 못하는 거야? 비싸도 미술 전문 운송 업체에 맡겼어야 했나?” 머릿속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끊임없이 보글거려 댔다. 결국 이른 아침 기사님께 연락을 했다.
- 요고코드: 기사님, 어제 그림을 실어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림이 쌓여서 장거리를 이동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화면이 손상될 까 걱정이 되네요 ㅠㅠ
- 기사님: 고객님, 걱정 마세요! 어제 실은 후에 그림을 다시 세워서 이동 중입니다. 그런데 도착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당길 수 있을까요? 제가 이후에 감자 300박스를 배달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림이 있으니 신경이 쓰이네요.
- 요고코드: (당연히 그림 배송 후 감자를 싣는 스케줄로 인식하고) 네! 감자;; 그렇네요! 그러면 한 시간 일찍 그림을 내리는 걸로 할게요. 이따 뵙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채비를 하고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기차표가 많지 않아 조금 이른 시간으로 예매를 했기에 그림을 기다리는 동안 뭘 할까 고민이었는데, 도착 시간이 당겨진다니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졌다. 탑차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그림들을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잔 탓에 KTX 안에서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인사동에 도착해서 예약해 둔 호텔에 체크인을 한 후, 그림 설치를 도와주러 온 친구와 점심 식사를 했다. '이 녀석과 벌써 24년째 우정을 나누고 있다니...' 살짝 울컥하려 하고 있는데 기사님께 연락이 왔다.
- 기사님: 고객님! 서울로 진입하는 차량이 많아서 아무래도 늦어질 것 같네요.
- 요고코드: (당황스러워하며) 헛;;; 얼마 나요? 갤러리에 도착 시간 변경을 했는데... 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조심히 오시구요. 도착 전에 연락 주세요.
- 기사님: 네네!
의도치 않게 다시 여유가 생긴 나는 친구 녀석과 함께 갤러리 근처 한옥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지만 이럴 때 필요한 건 그저 마음의 여유였다. 기사님은 결국 약속시간 40분 경과 후에 갤러리에 도착하셨다. 그림 설치를 도와줄 두 명의 친구들(부부)이 딱 맞춰서 도착해서 함께 탑차를 맞이했다.
두둥! 탑차 문이 열리자 엄청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워져 있는 그림들 뒤로 감자 300박스가 쌓여 있었던 것! 세상에.......... 그림을 내리고 다시 싣는 게 아니고 같이 이동해서 그림을 먼저 내린다는 얘기였던 것이다. (그림 옮기느라 미처 사진을 못 찍음. 아쉽)
그런데 갑자기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내 수준이 딱 감자 300박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술 전문 운송 업체에 맡길 수 없는 경제력과 인지도, 화가로서의 나의 적나라한 입지가 그 장면 하나로 설명되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합배송일지언정 장거리를 안전하게 이동해 온 그림들을 보니 퍽 안심이 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는 나도 전문 업체에 맡길 날이 오겠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