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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신 Jun 08. 2022

22년 6월 4일

 


22/06/04




나답지 않은 요즘이다.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돼서야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물론 10시가 넘어간 이후로는 안주를 먹지 않았고, 과음 또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 2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는 게 영 낯설었다. 좋은 기분도 아니었고. 그나마 오늘은 몇 년간 동고동락했던 동료들과 함께 했기에 새벽 공기에 젖은 기분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럴 때도 있어야지. 돌연 생각의 전환이 찾아왔다.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토요일 아침이 되면 별말 없이 이것저것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가장 처음으로 하는 건 집안에 있는 모든 창문을 다 열어두는 것이다. 밤새 집안에 고여있던 공기들을 내보내고, 그 자리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 줘야지 비로소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창문을 열어준 뒤 세탁기 안에서 대기 중인 있던 빨랫거리들은 돌려주고, 한 주간 알게 모르게 수북이 쌓인 바닥 먼지들도 쓸어준다. 은근히 굴러다니는 쓰레기들도 모두 분리수거해준 뒤 비로소 정리를 마친다. 아, 족히 20년은 된 알로에에 물 주는 일도 요즘은 나의 역할이다. 남여사는 무신경한 것에 비해 이렇게 잘 자라 주는 알로에에게 감사할 따름이라 늘 말하시곤 한다. 나도 그 말에 크게 동의하는 편이라 요즘에서야 신경을 써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 아침 정리는 내가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루틴이기도 하다. 이를 잘 마무리지어야 말끔한 마음으로 주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일종의 리추얼이라볼 수도 있지만 ‘정리’와 ‘청소’가 그 대상이라면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청소도 하고, 기분도 좋아지고. 그래서 오늘도 어김없이 토요일 아침 루틴을 말끔하게 소화하고 주말의 시작을 알렸다.




기다리던 서울 국제도서전에 가는 날. 오픈 날부터 곧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럴 때마다 회사원이라는 운명이 발목을 붙잡곤 한다. 그래도 주말에라도 갈 수 있어 다행이라 위로하며 코엑스로 향했다. 궁금한 나머지 미리 후기를 살짝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인파가 몰려 책 구경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궁금해서 후기를 찾아봤지만 예상치 못하게 달갑지 않은 내용이라 읽는 도중 돌연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 정보로서 머리에 들어왔기 때문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오늘은 맘 편하게 책도 읽고, 추천도 받으면서 즐기고 싶은데.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후기는 현실이었고 나의 바람은 속 편한 상상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그래, 그냥 내가 도서전에 무지했다 쳐두자.



민음사 부스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개인적으로 ‘클래식은 죽지 않는다’ 생각하는 편이라 세계문학전집이 한데 모인 섹션에서 읽어보고 싶었던 책들을 염탐했다. 사실 평소 찾는 서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굳이’ 민음사의 에너지가 가득 넘치는 곳에서 읽어보고 싶다는 오기 어린 소망에 여태껏 잘 참아온 것도 사실이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디스 워튼의 <여름>, 윌리엄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등. 설명글도 읽고 재밌어 보이는 건 초입부까지 읽으며 사고 싶은 책들을 이것저것 집었다. 그런데 갑자기 침대 옆 책상에 산처럼 쌓인 읽어야 할 책들이 비눗방울처럼 떠올랐다. 잠깐을 서서 고민하다가 지금 나의 바다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 욕심임을 인정하고 <싯다르타>만 구매했다. -잘 참았어..- 아, 물론 세계문화 전집에서 1권만 구매했다는 뜻이다. 조해진 작가의 <단순한 진심>과 문보영 시인이 집필한 <일기 시대>, 그리고 아버지에게 선물할 김수영 시인의 <시여, 침을 뱉어라> - 이것도 세계문학전집이긴 하다- 를 구매했다. 그렇게 총 4권을 구매해서 내 책상은 이유도 없이 더 무거운 무게를 견디게 됐다. 대신 내 마음은 편안해졌지.



집에 돌아오는 길. 좀 쉬면서 목도 축일 겸 테라로사에 들렀다. 마침 아이패드도 있어서 써놨던 글들을 하나 둘 펼쳐보며 어김없이 수정을 이어 나갔다. 앞전 일기에서도 말했지만 수정 과정 자체가 꽤나 큰 성취를 가져다준다. 성취는 곧 중독을 불러일으키고. 쾌락적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어디에서 만족하고 멈춰야 하는지’ 판단하는 게 조금 어렵다. 아직은 100번 읽으면 100번 수정을 하게 되는터라 쉽지가 않다. 그러나 이 또한 익숙해지면 자연히 나만의 기준이 생기지 않을까. 분명 수정할 게 보이더라도 그 정도는 기분 좋게 묵인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이. 잠시 소망의 세계에 머리를 담갔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와 남은 일기와 독백글을 수정해 나아갔다. 한 잔의 아메리카노도 하루 동안 마시는 나의 잔은 어느덧 비어 있었다. 그만큼 수정 작업에 몰입한 걸로 간주하고 짐을 싸 귀로에 올랐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맥주 4캔을 구매했다. 매일같이 이렇게 맥주를 마시는 게 몸에 해롭고, 살을 찌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매듭짓는다는 사실이 너무 낭만적이고, 어른스러워서 포기하기 쉽지 않았다. 물론 맥주 맛도 잘 모르기 때문에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거나 패키지가 예쁜 맥주들만 골라 담는 나지만, 그래도 일전에 알지 못했던 맥주의 시원함을 깨달았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후, 나 어른이 되어가나 봐요.



주문한 빈티지 조명이 왔다. 상당히 좋은 가격에 좋은 친구를 데리고 와서 기분이 너무 좋다. 다만 원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스탠드 등도 상당히 오래된 친구라 박힌 돌 빼듯 무정하게 버릴 순 없었다. 마치 일본인들은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들어져 있다 믿듯이 나 또한 이 스탠드 등에는 왠지 모를 감정이 스며들어 있으리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물과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유대감 같은 것이 존재한다 믿는 편이라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린 누나부터 성인이 된 나의 방을 밝혀준 친구이기 때문에 가볍게 처리할 순 없었다. 마침 문제없이 작동도 되던 터라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남여사를 꼬드겼다. 운이 좋게도 남여사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쓰던 스탠드는 남여사의 아지트로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내 방을 십수 년 간 밝혀주던 스탠드 등은 이젠 남여사의 방을 밝혀주게 되었고, 내 침대 옆에는 빈티지 조명이 자리하게 되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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