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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신 Sep 04. 2022

22년 9월 1일


22/09/01


마지막 출근길은 뭘 해도 달랐다. 잠에서 깨어나는 감각도, 출근 준비를 하는 느낌도, 숨 막힐 듯 꽉 찬 지하철 안에서의 기분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개운한 기분이었다. 마치 오늘 지나치게 맑게 개인 여름과 가을 사이의 높은 하늘처럼. 세상 위를 유영하고 있는 햇빛은 보기 좋게 여물어 있었다. 오늘은 안녕하기 딱 좋은 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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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생각 없이 일처리를 했다. 그러나 첫 퇴사인지라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 당혹스러웠다. 조금 눈치가 보여 치우지 못한 자리는 당일이 되어 골칫거리가 되었고, 며칠에 걸쳐 꼼꼼하게 준비한 인수인계 파일에는 빈틈이 속속들이 보였다. 너무 개운해도, 너무 개운치 못해도 문제인 것 같다. 원래 안녕이라는 게 그럴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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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메일을 보냈다. 여태껏 내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셨던 외부 업체와 실장님들, 내부 직원들을 향한 마지막 형식적인 인사였다. 점점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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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감독님께 전화가 왔다. 그간 고생 많으셨다고. 앞날을 응원한다고. 더불어 추천해주고 싶은 자리가 있다고 하셨지만 아쉬움을 머금고 가야 할 길이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그럴 것 같았다고, 잘할 거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로 만나볼 수 있길 고대한다는 안녕이 대화의 매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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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가진 회식이었다. 팀원들이 좋아하는 고기를 먹었고, 나름대로 주인공인지라 테이블 가운데에 앉았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사실을 알고 있는 팀원들은 굳이 술을 권하진 않았지만 내가 앞다퉈 술을 마셨다. 나의 성향 때문에 즐거울 수 있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분위기는 잘 무르익었고, 나는 얼큰하게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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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름 아끼던 후배와 투박한 인사를 나누고 카톡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조차 낯간지러웠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그런 애틋한 장면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가 내 마음을 알런가 모르겠지만 항상 그에게 즐거운 일이 함께 했으면 바랐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건 오래 함께한 선배. 여태껏 좋은 누나 동생으로 지내온 만큼 우린 다시 한번 개인적인 관계로 돌아갔다. 누나와의 시간은 항상 애틋하다.

 누나를 데려다 주기 위해 왕십리역 5호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오는 마천행 열차에 누나를 보내기 전에 어설픈 포옹을 나눴다. 그것이 내가 최선으로 표할 수 있는 선배를 향한 존경심이었고, 인간으로서의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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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집에 온지는 흐릿한 기억으로나마 남아 있었다. 귀로는 그저 내 본능을 기반으로 한 상상에 맡겨야 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후 대충 짐을 던져놓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맡겼다. 씻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날의 여운을 최대한 오래 품고 잠들고 싶었다. 난 그렇게 소망대로 잠에 들었다. 그것이 내 처음이자 마지막 퇴사 날의 마침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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