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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Apr 02. 2019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뜻밖의 선물

고독 속에서 타인의 향기를 그리워할 때 외로움을 발견했다.

촉수. 무척추동물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돌기 모양의 기관. 척추를 가진 인간이지만 내게도 촉수가 있다. 성장하면서 알게 된 건 나는 남들보다 촉수가 많다는 점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예민하다고들 하더라. 스치는 바람에서 지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차가운 기운에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며 흙에서 풍기는 비냄새에 우산을 꺼내들기도 한다. 서른날서른밤은 여행 속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기록한 글이다. 행여 잊혀질까 두려워 종이만 보면 적는 습관도 생겼다. 오늘은 참으로 사진 찍기 좋은 날이다. 






#고양이 60%, 강아지 40%


701번(지금은 201번으로 번호가 바뀌었다) 버스에 오름으로써 하루를 시작했다.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동쪽 해안을 따라 쭉 내려가는 노선. 뚜벅이 여행자라면 정말이지 친근한 버스, 701번. 버스 안에는 관광객 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많았다. 고작해야 5일 머물렀는데 벌써 눈에 익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할머니들은 수다스러웠고 오늘도 나는 제주도 사투리가 귀여워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할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늘 익힌 제주도 방언은 의문형 문장에는 -수꽝? 이 들어간다는 것과 '누가'라는 말은 '누게'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나의 학습능력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게 안타깝다.


40분 정도 탔을까. 오늘의 행선지 함덕리에 도착했다. 제주도에서 아름답기로 자자한 3대 바다 중 한 곳인 <함덕 서우봉 해변>. 바다를 보자마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나는 에메랄드빛 바다색이 무척 아름다워서, 다른 하나는 바닷바람이 너무 심해서였다. 찬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결론은 이곳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여행 5일째를 지나오면서 단 한순간도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나의 외로움을 말하기 전에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여행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혼자이기를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외로움을 느낀다기보단 고독을 즐기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나를 두고 고양이 같은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그말에 수긍이 되더라. 


그런 내가 오늘은 '외로움'에 굴복하고 말았다. 알고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였던 건가? 눈앞에 펼쳐진 하늘빛보다도 더 하늘빛의 함덕 서우봉 해변을 나 혼자 보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순간, 누군가 떠올랐다면, 그 사람을 소중히 한다는 것이었다. 함께 보고 나누고 싶다 느껴지는 사람에게 정신없이 이 광경들을 보냈다. 자연을 즐기는 나를 즐기던 내가 폰을 붙들고 무슨 사진을 보낼까 고심하는 나를 발견하던 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걸. 고독 속에서 타인의 향기를 그리워할 때 외로움을 발견했다. 



서우봉 둘레길을 오를 땐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드문드문 꽂혀있는 메시지들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제껏 의도치 않게 많은 둘레길을 걷고 지나쳐왔지만, 이곳은 조금 더 감성적이다. 수채화 같은 배경 아래에서 엄마가 말해주듯 따뜻한 메시지들. 토속적인 말투로 전하니 더욱 느낌이 진하게 배어 온다.


둘레길 중턱, 말들이 곳곳에 있었다. 예전에 교과서에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제주도는 고도에 따라 나는 식물이 다르다고 했는데 중간쯤 말이 있었다. 그때 '말이 왜 산에 살지.. 말에게 너무 가파르지 않나. 제대로 설 수는 있나' 하는 순수한 걱정을 했었더랬다. 지금은 이곳의 경치를 꾸며주는 병풍처럼 보고 지나칠만큼 나는 순수함을 잃었는데. 그곳을 지나치는 아이들은 이를 신기하듯 보았고, 말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많이 춥지!", "밥은 먹었어?"... 지금의 나는 이 말들을 보고 주인장은 어디에 있는지, 한 마리 말만 키우시는 건가에만 관심이 갔는데, 아이들은 말을 먼저 걱정했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예쁘다. 나의 잃어버린 동심이 슬프다.



#제주도에 온 진짜 이유


우연히 알게 된 <귤꽃 카페>. 사실 이것 때문에 함덕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에서 확인해보니 해변에서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바다가 멀어지고 줄지어 있던 식당가도 정류장도 사라지고 나면 한적한 전원 마을이 나오게 된다. 이쯤이면 나오겠지, 싶었다가도 나오지 않았다. 여유가 불안으로 바뀔 무렵, 그곳을 만날 수 있었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와서야 만나게 된 곳, 내가 온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왔다. 이들도 나와 같은 길을 거쳐 왔을 생각을 하니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귤꽃카페에서는 모름지기 감귤라떼를 마셔줘야 한다. 서울에서도 팔지만, 감귤밭에서 마시는 감귤라떼는 처음이니까. 주문을 마치고 카페를 둘러보았다. 손이 안 간 데가 없을 만큼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주인 언니의 남다른 센스를 엿볼 수 있다. 혼자 운영한다는데,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관리를 할까 새삼 존경스러웠다. 누군가의 취향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곳, 책장. 역시나 감성 잡지 <어라운드>가 있다. 쉽게 납득이 되면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 주인 언니 (존경스럽다 싶으면 무조건 언니다- 는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지닌 누군가를 동경한다 했다. 섬세한 감각을 갖고 있는 이 언니가 무척 부럽다. 언니는 커피를 내주면서 따뜻할 때 마시라 했는데, 사진 찍느라 그 말을 지킬 수 없었다.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그 상태, 그대로를 사진에 담고 싶었다.


오후 3시 이후, 첫 손님은 나였다. 3시에 내가 이곳에 왔으니 확실하다. 집을 나선 이후로 쉼 없이 돌아다니다 이제야 여유를 되찾았다. 문득, 나의 양 볼이, 정확히 말하자면 두 광대가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제주도의 찬 바람에 휘청대느라 작열하는 태양을 잊었나 보다. 거울을 들여다보진 않았지만 분명 두 볼은 촌년같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찬 손으로 양 볼을 대강 식혔다. 언제쯤 커피 맛을 느껴볼 수 있을까.


이곳엔 개가 많다. 본 것만 세 마리 정도. 그중 가장 큰 놈 이름이 '오광이'다. 정갈하게 털을 빗었는지 머리를 쓰다듬는데 복슬복슬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 아이는 내 근처를 맴돌았는데 사진을 찍어주려 하면 나를 보다가도 얼굴을 피했다. 나 이외에도 이곳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찍으려고 렌즈를 들이밀었겠지. 오기가 생겼는지 나는 기어코 아이의 얼굴을 찍고 말았다. 오늘 할 일은 이쯤에서 다 한 듯싶다.



이것을 위해 제주도에 왔다. 제주도에 온 목적은 관광지도, 둘레길도, 꽃놀이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이것을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나는 점점 멍청해지고 있었다. 쉽게 말해 지적 갈증이 심했다. 그렇다고 또 대단한 글을 읽는 건 아니었지만. 여행 5일째가 되어서야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을 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 대화를 기억하기 위해 글로 옮겨 놓는다. 글씨체에 자신감은 없지만 손글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것을 (굳이굳이) 고집한다. 평소에도 악필이긴 하지만, 이때 쓰는 글씨체는 정말이지 가관이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머릿속 대화에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나의 손은 그것을 따라와 주지 못 했다. 내 수첩을 보면 거의 휘갈기다시피 쓴,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기록이다.


어느 정도의 소음은 글 쓰는데 도움이 된다. 주인 언니가 설거지하는 소리, 무심히 흐르는 재즈, 이 모든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이들의 소리에 둘러싸여 있기에 어쩌면, 나의 내면의 소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조용할 땐 작은 소음에도 괜한 신경이 쏠리기 마련이니까. 오후 5시 30분, 이곳에는 다섯 사람과 오광이가 있었다.



책을 읽는데 눈앞을 밝히던 빛이 불안한 듯 아른거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 나뭇가지가 석양 빛에 취했는지 넘실넘실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던 석양은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 시간을 특별히 애정 한다. 주황빛이 마치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 같아 괜히 나의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느덧 카페 안 그림자가 길어졌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걸어가시죠? 따뜻한 아메리카노예요.
손 녹이면서 가세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자리를 정리하고 인사를 하는 내게 주인 언니는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커피를 받고 용기가 생긴 걸까. 언니에게 SNS를 하냐고 물었다. 잠깐 지나치듯 잊히는 인연이 아니라 멀리서나마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고백이기도 했다. 그렇게 언니와 나는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었다. 이 언니는 인테리어 감각 못지않게 마음을 다독이는 섬세함까지 갖췄다. 귤꽃향기 가득한 언니 덕분에 더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어달리기처럼, 내가 받은 선물도


동일주 노선인 701번 버스는 버스비를 계산하기 전, 기사님께 행선지를 말해야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 (당시엔 그랬다. 80년대 여행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2016년 이야기다. 지금은 승하차시 카드 찍으면 자동으로 거리계산해서 버스비가 계산된다. 서울과 같다) 웬만한 관광지는 모두 지나치기에 관광객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중 절반이 중국인 관광객이다. 이들은 떠듬떠듬 영어로 행선지를 말하는데, 기사님들께서 알아듣지 못하실 때가 많다. 이번의 경우도 그랬다. 언뜻 듣기로 표천리를 가고 싶다 말했지만 단번에 소통이 안 되자, 기사님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곤란해하는 중국인들.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나. 


- 기사님, 표천리 말하는 거 같아요.

- 표천리라는 곳은 없어요.

- 아, 그럼 표선리 아닐까요?


중국인들은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보더니 나에게 종이를 건넸다. 그곳엔 '고성리'라고 적혀 있었다. 기사님께 제대로 말씀드렸고 그곳을 말하는 거였냐며 그에 맞는 가격을 찍어주셨다. 


고맙습니다


중국인들은 그제야 안심한 듯 짐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이곳 제주에서 나도 이방인이지만 더 멀리서 온 이방인을 위해 재능기부를 해주었다. 그들보단 내가 제주민들과 언어가 통하는 사람이니까. 나 또한 해외여행을 갔을 때, 언어로 소통이 힘들었던 기억이 많기에 도움을 준 것뿐이다. 오늘 누군가에게 받은 예기치 않은 선물로,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의도하지 않은 선물을 건네본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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