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모르는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싶다.
지난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집안의 모든 사물들은 지금의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힘겨루기 하듯 덜컹거렸지만 굴복하진 않았다. 늦은 3월, 어둠이 내린 봄날에 나는 이런 성난 바람이 익숙지 않았다. 온 집안의 것들이 그것을 잘 견뎌낼 때, 두려움에 떨던 유일한 존재는 나, 서울 여자 하나였다. 얼굴도 모르는 집주인 여자가 보고싶어졌다.
집주인이 없는 집에 외간 여자가 이곳저곳 누빈다. 처음엔 조심스레 들어왔지만, 지금은 거침없다. 뛰어다니기도 한다. 누군가의 통제도 간섭도 없이 자유로운 상태. 그러다 문득, 주인 여자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난무하는 그 여자의 흔적들 탓이다.
1) 그녀는 심플하다.
블랙과 화이트만을 활용한 집.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다. 집안에 세간살이가 얼마 없고, 모두 깨끗하다. 처음 이 집에 대해 사진을 보았을 때도 다른 셰어하우스에 비해 물건이 참 없다?라고 느꼈다.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사진 그대로다. 사는데 최소한 것들만 갖다 놓았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마냥. 모델하우스같이 깔끔한 이 집에 사람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물건마다 사용법이 적힌 손글씨다. 이마저 코팅을 해놓거나 액자에 넣어놓았다. 인간미마저 깔끔하다.
관찰을 조금 더 깊게 해 보면 이 여주인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가 알 수 있다. 색 조합이다. 블랙과 화이트뿐만 아니라 소품들에서 한 가지 컬러로 포인트를 주었다. 나무 문에 직접 칠한 하늘색 페인트 (직접 칠했다는 건 창고에서 발견된 하늘색 페인트 통을 보고 알았다), 하늘색 액자 속엔 코타츠 사용법이, 벽 귀퉁이에 늘어져있는 하늘색 쿠션 소파. 이 모든 게 한 공간에 어우러지니 아기자기함이 배가 되었다. 아, 코타츠 덮개 천도 하늘색이다.
2) 그녀는 감성적인 보헤미안이다.
영화, 책, 음악 등.
그 사람의 취향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책의 카테고리를 먼저 보자. '7년째 신혼여행 중'이라는 컨셉에 맞게 여행 책이 눈에 띈다. 여기 주인 부부는 여행을 좋아한다. 손님을 두고도 여행지에서 더 머물 생각을 할 정도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다음 눈에 띈 것. '알랭드 보통'. 여행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책이 '보통'의 책이다. 이쯤 되면 열렬한 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 방 책장에 노희경 작가의 대본집이 가득하듯. 세 번째는 작년에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감성 문화 잡지, '페이퍼'다. 족히 15년 치는 되는 거 같다. 물론 모두 있는 건 아니다. (모두 갖고 있었담 소름 끼치잖아?) 지난여름을 끝으로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이 말은 한때 수집했었으나 어떤 심경의 변화로 구독을 철회했다는 것. 이쯤 되니 감성/여행/철학. 이 정도로 그녀의 취향 카테고리가 정리가 된다.
3) 당황스러울 정도로 발랄하다.
이 집에 온 날부터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달력상으론 찬물로 씻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아직 나는 따뜻한 물이 필요했다. 인도인지, 방콕인지 어딘가에서 여행 마무리를 하고 있을 이 집 여자를 괴롭히긴 싫었다. 정말이지 싫었는데,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더랬다. 그녀에게 SOS 요청하기 전, 그전까지 최선을 다해 혼자 살아나 보려 했다. 우선 뒷마당에 나가 가스통 밸브를 확인했다. 열려있다. 보일러 밸브도 확인했다. 열려있다. 이건 가스가 없다는 뜻이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이후 가스회사에 전화했다. 언어를 익힐 때 가장 고난도의 테스트가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전화 듣기다. 표정, 입 모양 등의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귀로만 듣고 뜻을 파악해야만 하는 것. 난데없이 제주도 방언 듣기 평가 시험지 앞에 놓였다. 수화기 너머 아저씨께서 보일러 가스가 어쨌다고 말씀하시는데 식은땀이 났다. 내가 진정 한국에 있는 건가. 다시 전화한다고 할까. 아냐, 찬물론 씻을 순 없는데... 모르겠다, 내 말만 하자.
그래서 귀하게 얻었다. 온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반가웠다. 가스배달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문자를 남겨놨던 게 기억났다. 이 여자도 어지간히 답답했을게다. 먼 곳에서 손써줄 방법이 없을 땐 손 놓고 기다리는 것 말곤 별다른 방도가 없을 때만큼 답답한 순간이 없으니까. 지난날 걱정했을 주인에게 안심하라 문자 남겼다. 그런데 이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녀는 농담인지 진담일지 모르는 말로 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제주살이 미션 수행 완료!
다음 미션은 무엇일까요?^^
... 웃어야겠지? 그래, 웃자고 하는 말일 테니 웃어야지. 하하하. 갈수록 궁금해지는 여자다. 얼굴 모르는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