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위한 필사 <초보 노인입니다, 김순옥>
가을이 되면 먹산은 풍성해진다. 온갖 색깔의 단풍이 미처 들기 전에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열매를 쏟아낸다. 산 위로 올라가면 등산로를 사이에 두고 양 옆에 오종종 모여 있는 도토리 무리를 볼 수 있다. 이럴 때 맨머리로 등산을 하다가는 여기저기서 도토리나 밤송이에 얻어맞기 십상이다. 밤이나 도토리로 머리를 맞으면 아프거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나기는 했지만. 떠나고 싶었으나 여전히 실버아파트를 떠나지 못한 나는 이곳에서 벌써 세 번째 가을을 맞았다. 올해는 유난히 도토리가 많다. 산 어디를 봐도 앙증맞고 반질반질 빛나는 도토리가 무리 지어 있었다. 어떤 것은 미처 모자를 벗지 못한 채로 있기도 했다. "언니 도토리 좀 주워와. 엄마가 도토리묵을 엄청 좋아하시는데." 며칠 전 모임에서 먹산의 도토리 얘길 했더니 후배가 대쯤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도토리를 주워 본 적도 없고 도토리묵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었다. 도토리묵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야, 산에 다람쥐와 고라니도 있는데 걔들이 겨울에 먹어야지." 도토리를 주울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궁색하지만 사실이기도 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후배는 예상했다는 듯이 나의 거절을 웃어넘겼다. "언니, 걔네들 먹을 건 충분해. 도토리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사람도 먹으라고 도토리가 열리는 거 아닌가? 산에서 나는 것은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다 먹이야. 좀 주워와 봐." 후배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산을 오르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아휴, 세상에나! 도토리는 금방 손안에 가득 찼다. 가방에 털어 넣은 후 다시 주워서 털어 넣길 두 번 더 했다. 그러다가 도토리에 눈이 팔려 땅만 보고 걷는 내가 한심해졌다. 더 이상 줍기를 포기하고 그냥 걸어가는데 숲 사이에서 덤불을 헤쳐 가며 뭔가를 줍는 아주머니 같은 할머니를 발견했다. 분명 도토리를 찾아 줍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든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가방을 허리에 동이고 있었다. 배낭을 지고 와서 도토리를 쓸어가는 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저 도토리 주우시는 거죠? 제가 한 움큼 주웠는데 드릴게요." 공연히 멋쩍어하는 할머니에게 내 도토리를 세 움큼 옮겨 드렸다. 할머니는 작은 가방에 도토리를 받아 넣고는 사탕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거 하나 드세요. 요 며칠 사람들이 도토리를 주워서 저에게 주네요. 어젠 어떤 할아버지가 두 주먹 주워 주시면서 '벌써 두 번째 드리는 겁니다.' 그러시더라구요. 할머니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김순옥 <초보 노인입니다_가을의 먹이 활동>
일.
회사 가로수길에 심어진 나무는 은행이었다. 그런데 회사는 본래 은행나무가 있던 자리에 다른 나무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그 많던 은행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 앙상한 가지에 키만 큰 나무가 정체성을 드러내던 가을쯤 나무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알맹이들을 보고 그제야 나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마치 다람쥐라도 된 양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새로 심은 나무가 상수리였어" 하고 들떠 말하니, 사람들은 뭣이 그리 기쁜가? 하는 얼굴로 무심히 나를 보았다.
이.
그해 가을 알맹이가 영글어 바닥에 툭툭 떨어진 도토리를 주웠고, 그것들을 깨끗이 닦아서 팀원들 책상 위에 세 알씩 올려놓았다.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인 도토리처럼, 사람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는데, 우리 팀에 ‘다람쥐가 산다’부터 콧방귀를 뀌며 웃거나,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감성 파괴까지 반응이 다양했다. 나는 뭘 어쩌자는 건 아니고, 그저 조금 귀여운 하루를 같이 시작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물론 나는 이 년째 누가 시키지도, 딱히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 일을 내가 좋아서 한다. 대체로 어이없어하는 그들도 눈과 입은 웃고 있으니까.
삼.
회사에는 청설모와 다람쥐가 산다. 그리고 고양이들이 산다. 나는 회사가 상생의 의미로 조경 나무 중 일부를 상수리나무로 바꾼 것이 아닐까? 제멋대로 생각하며 애사심마저 일었다.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보살피니까, 회사가 그들을 위해 이곳저곳 상수리를 심고, 그들의 망각이 여기저기에 상수리나무를 뿌리내리게 하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의식의 흐름이랄까.
사.
도토리 얘기를 하다 보니 숫자가 늘었다. 내가 처음 도토리를 주운 건 동묘공원이었고, 그때부터 나는 도토리를 줍고 싶단 욕망이 솟을 때, 세 개 정도는 주머니에 넣어와 탁자 위에 관상용으로 올려놓았다. <초보 노인입니다> 책에서 동생은 ’ 산에서 나는 것은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다 먹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산에 올라가면 작은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있다. (도토리 줍지 말고, 다람쥐에 양보하세요) 나는 10kg 도 아니고, 한 번에 서너 개쯤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줍는 것이니, 다람쥐들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어 본다.
오.
회사 출근이 늦은 편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미화해 주시는 분들이 도토리가 떨어지기 기다렸다가 밟히지 않도록 아래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밀어 넣는 것인지, 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우연히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아 졌다. 그 때문에 가끔은 나무 아래 풀숲에서 보물찾기 하듯 도토리를 줍고 있다. 이것을 가을 채집이라고 해도 좋을까? 그렇담 올가을 채집도 기대가 된다.
육.
나는 도토리가 너무 귀엽다. 사진은 우리 집 도토리 존이다.
칠.
그리고 올해, 첫 도토리 가을 채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