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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23. 2023

본격! 도토리 채집

글을 위한 필사 <초보 노인입니다, 김순옥>


가을이 되면 먹산은 풍성해진다. 온갖 색깔의 단풍이 미처 들기 전에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열매를 쏟아낸다. 산 위로 올라가면 등산로를 사이에 두고 양 옆에 오종종 모여 있는 도토리 무리를 볼 수 있다. 이럴 때 맨머리로 등산을 하다가는 여기저기서 도토리나 밤송이에 얻어맞기 십상이다. 밤이나 도토리로 머리를 맞으면 아프거나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나기는 했지만. 떠나고 싶었으나 여전히 실버아파트를 떠나지 못한 나는 이곳에서 벌써 세 번째 가을을 맞았다. 올해는 유난히 도토리가 많다. 산 어디를 봐도 앙증맞고 반질반질 빛나는 도토리가 무리 지어 있었다. 어떤 것은 미처 모자를 벗지 못한 채로 있기도 했다. "언니 도토리 좀 주워와. 엄마가 도토리묵을 엄청 좋아하시는데." 며칠 전 모임에서 먹산의 도토리 얘길 했더니 후배가 대쯤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도토리를 주워 본 적도 없고 도토리묵을 만든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었다. 도토리묵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야, 산에 다람쥐와 고라니도 있는데 걔들이 겨울에 먹어야지." 도토리를 주울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궁색하지만 사실이기도 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후배는 예상했다는 듯이 나의 거절을 웃어넘겼다. "언니, 걔네들 먹을 건 충분해. 도토리가 얼마나 많이 나는데. 사람도 먹으라고 도토리가 열리는 거 아닌가? 산에서 나는 것은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다 먹이야. 좀 주워와 봐." 후배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산을 오르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아휴, 세상에나! 도토리는 금방 손안에 가득 찼다. 가방에 털어 넣은 후 다시 주워서 털어 넣길 두 번 더 했다. 그러다가 도토리에 눈이 팔려 땅만 보고 걷는 내가 한심해졌다. 더 이상 줍기를 포기하고 그냥 걸어가는데 숲 사이에서 덤불을 헤쳐 가며 뭔가를 줍는 아주머니 같은 할머니를 발견했다. 분명 도토리를 찾아 줍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든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가방을 허리에 동이고 있었다. 배낭을 지고 와서 도토리를 쓸어가는 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저 도토리 주우시는 거죠? 제가 한 움큼 주웠는데 드릴게요." 공연히 멋쩍어하는 할머니에게 내 도토리를 세 움큼 옮겨 드렸다. 할머니는 작은 가방에 도토리를 받아 넣고는 사탕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거 하나 드세요. 요 며칠 사람들이 도토리를 주워서 저에게 주네요. 어젠 어떤 할아버지가 두 주먹 주워 주시면서 '벌써 두 번째 드리는 겁니다.' 그러시더라구요. 할머니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김순옥 <초보 노인입니다_가을의 먹이 활동>






일.

회사 가로수길에 심어진 나무는 은행이었다. 그런데 회사는 본래 은행나무가 있던 자리에 다른 나무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그 많던 은행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 앙상한 가지에 키만 큰 나무가 정체성을 드러내던 가을쯤 나무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알맹이들을 보고 그제야 나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마치 다람쥐라도 된 양 기뻐하며 사람들에게 "새로 심은 나무가 상수리였어" 하고 들떠 말하니, 사람들은 뭣이 그리 기쁜가? 하는 얼굴로 무심히 나를 보았다.​​



이.

그해 가을 알맹이가 영글어 바닥에 툭툭 떨어진 도토리를 주웠고, 그것들을 깨끗이 닦아서 팀원들 책상 위에 세 알씩 올려놓았다. 크기나 모양이 제각각인 도토리처럼, 사람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었는데, 우리 팀에 ‘다람쥐가 산다’부터 콧방귀를 뀌며 웃거나,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감성 파괴까지 반응이 다양했다. 나는 뭘 어쩌자는 건 아니고, 그저 조금 귀여운 하루를 같이 시작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물론 나는 이 년째 누가 시키지도, 딱히 기뻐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 일을 내가 좋아서 한다. 대체로 어이없어하는 그들도 눈과 입은 웃고 있으니까.

​​


삼.

회사에는 청설모와 다람쥐가 산다. 그리고 고양이들이 산다. 나는 회사가 상생의 의미로 조경 나무 중 일부를 상수리나무로 바꾼 것이 아닐까? 제멋대로 생각하며 애사심마저 일었다.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보살피니까, 회사가 그들을 위해 이곳저곳 상수리를 심고, 그들의 망각이 여기저기에 상수리나무를 뿌리내리게 하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의식의 흐름이랄까.



사.

도토리 얘기를 하다 보니 숫자가 늘었다. 내가 처음 도토리를 주운 건 동묘공원이었고, 그때부터 나는 도토리를 줍고 싶단 욕망이 솟을 때, 세 개 정도는 주머니에 넣어와 탁자 위에 관상용으로 올려놓았다. <초보 노인입니다> 책에서 동생은 ’ 산에서 나는 것은 동물에게나 사람에게나 다 먹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산에 올라가면 작은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있다. (도토리 줍지 말고, 다람쥐에 양보하세요) 나는 10kg 도 아니고, 한 번에 서너 개쯤 너무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줍는 것이니, 다람쥐들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어 본다.


오.

회사 출근이 늦은 편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미화해 주시는 분들이 도토리가 떨어지기 기다렸다가 밟히지 않도록 아래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밀어 넣는 것인지, 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우연히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아 졌다. 그 때문에 가끔은 나무 아래 풀숲에서 보물찾기 하듯 도토리를 줍고 있다. 이것을 가을 채집이라고 해도 좋을까? 그렇담 올가을 채집도 기대가 된다.


​​

육.

나는 도토리가 너무 귀엽다. 사진은 우리 집 도토리 존이다.



칠.

그리고 올해, 첫 도토리 가을 채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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