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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22. 2023

엄마와 딸, 신비와 신기 사이

글을 위한 필사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김하나&황선우>


가족들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침잠을 깨웠다. 뭘 썰거나 끓이거나 기름에 굽거나 하는 주방의 생활 소음은 너무 구체적이고 현실감 넘쳐서 꿈에서 미처 깨어나기 전의 몽롱한 정신에는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직 지각이 선명하지 않은 감각 기관 중에 코끝으로 음식 냄새가 제일 먼저 스며드는 게 그때는 불쾌하게 다가왔다. 눈 뜨자마자 식탁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니, 지금이라면 행복감에 넘쳐 벌떡 일어날 텐데 말이다. 가족을 떠나 혼자 산다는 것은 누구도 음식 냄새로 나를 깨워주지 않는 아침이 수 천 번 이어지는 일이었다. (...) 혼자의 식탁은 효율성과 편의를 우선으로 꾸려진다. 삶은 달걀 한두 개에 사과나 고구마 같은 걸로 때우기도 하고 햇반을 데워 레토르트 카레와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비롭게도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더 부지런할 수 있는 존재다. 누군가와 함께 먹을 식사를 차린다면, 무슨 힘에선지 국이라도 하나 끓이고 더운 찬이라도 한 가지 볶게 되는 것이다.


김하나 /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_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





학창 시절 이후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가 모닝콜이 되었던 적이라면. 명절에 춘옥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제사상에 올릴 조기를 줍거나, 탕국을 끓이고, 소고기를 구워내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칠십 대 초반의 여자 사람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감탄하는 날 뿐이고. 보통은 이미 깨어버린 내가 뭉그적거릴 때 "밥 언제 먹을까?" 묻는 냄새 없는 아침이 우리 모녀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 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춘옥은 나이가 들면서 적당히 게으르고, 느긋한 사람이 되었다. 집밥보다 외식을 좋아하고, 끼니를 가볍게 건너뛰는 건 물론이고, 살찌는 게 싫다고 가끔은 셰이크를 먹기도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불고기버거를 내가 사주지 않고 돌아온 어떤 날에 전화해 "너 왜 내 햄버거 안 사주고 갔어?" 물어와 나를 웃게도 반성하게도 한다. 그것과 별개로 여느 엄마들처럼 때마다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택배로 보내는 정성은 그대로지만. 가끔 춘옥의 냄새 없는 말 말고, 소고기를 넣어 자박하게 끓인 구수한 된장찌개나 고등어구이 냄새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녀 앞에서라면 언제라도 어린 딸이 되고 싶은 나는. 고작 일 년에 네 번 손님처럼 방문해, 삼시 세끼를 얻어먹고도 아침은 그렇게 나를 깨워달라고 하는 것이다. 춘옥이 나를 위해 차리는 밥상이 무한할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바라고 맛있게 얻어먹으며 불효 아닌 불효를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들고 데우며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다가도 신기하게도 그녀 앞에만 가면 그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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