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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20. 2023

아빠의 가녀린 희망

글을 위한 필사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권정민>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베란다를 차지하게 되었냐고요? 좋은 질문입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관찰해 왔습니다. 쉽지만은 않았죠.


권정민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일.

아빠는 가족보다 식물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아픈 친구들이 자주 머물곤 했는데, 별다를 게 없어 보였던 아빠의 손을 거치고 나면 다시 쌩쌩한 몸이 되어 제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 집 천하제일 불통이었던 아빠가 식물을 다루는 손길만큼은 그리도 다정한 사람이었단 것이 이상할 대로 이상하였지만 살면서 누구나,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니까. 볕 좋은 집안 곳곳을 양보하고, 통풍에 신경 쓰며, 시든 이파리 하나에 마음 쓰는 지금에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빠 손이 약손이었던 식물들과 아빠가 그들에게 품었을 가녀린 희망을.


이.

언제부터 우리와 함께 살았는지, 누구의 집에서 왔는지, 처음부터 그렇게 거대했는지, 가녀린 꽃대에 사계절 붉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무겁진 않았는지. 길고 뾰족한 잎사귀마다, 흩날리는 눈이 그대로 박힌 듯. 겹겹이 화려한 이 식물은. 어쩌다 고향 텍사스를 떠나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거라곤 '베고니아'라는 이름뿐이었다. 물꽃이 만으로 쉽게 뿌리를 내어주던 베고니아를 집집이 나눠주는 것. 그 식물이 새로운 환경에서 잘 자라는 것만으로도 베고니아는 아빠의 자랑이 되었다. 그렇게나 크고 화려했던 베고니아가 초록별로 떠난 것은 지난한 겨울 끝. 아빠가 떠나고 찾아온 첫 번째 봄이었다. 후에 엄마는 그때 그 베고니아 자손들을 몇 번이고 데려왔지만, 모두 살려내지 못했다. 그토록 순했던 그 아이가 사람의 마음으로 식물을 보니, 식물에도 마음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그 애는 알았을 것 같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관찰해 왔을 테니까.



삼.

식물에 관심을 가지고서야 알게 된 그 애의 진짜 이름은 베고니아 화이트 아이스였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그와 비슷하지만 하얀 꽃이 피는 베고니아 마큘라타가 산다. 며칠 전 두 번째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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