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il Sep 11. 2023

고단하고 묵묵한 절규 속 취향으로 가득한 집

글을 위한 필사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 최고요>


오래된 집에 산다. 선택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음에 더 가까웠지만. 서울에 살고부터는 작고 오래된 집에서만 살았다. 초라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니까.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닐 때면 내가 살게 될 곳에 더 낡은 스위치 커버가, 더 옛날 문짝이 달려 있기를 바랐다. 오래된 창틀, 80년대 스타일의 펜던트등 같은 것이 지금의 집을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예쁜’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내 집은 나의 눈과 마음에 위화감이 없고 나의 생활방식과 나의 사고방식에 어울리는 곳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화려할 것까진 없어도 아침에 눈뜰 때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인지시켜주는 그런 집.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서 얻은 나만의 안정이고 안심이었다. 오래되어 낡은 집에 산다. 조금 세게 걸어 다니면 창문의 흔들거림이 느껴지는 집. 침대에 누워 있으면 나무 창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미는 집. 기어이 이불을 콧등까지 덮게 만드는 집. 추운 겨울에는 화장실에 난로를 틀어야 하는 집. 낡아서, 내가 발견해주어야 했던 집.


최고요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_#4 인테리어 계획하기>





퇴근 후 이사할 집으로 두 번째 출근했을 때의 일이다. 다시 한번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새 붓을 꺼내 페인트를 칠했다. 반복적으로 얇게 펴 발라도 숙련공이 아니었던 나는 페인트의 눈물을 자주 목격해야 했다. 고단하고 묵묵한 절규가 터졌다. 80만 원을 아껴보겠다고 14일째 칠을 기다리는 몰딩, 타일, 오래된 문과 ‘눈물 전쟁’을 하는 내가 나조차 피곤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집이 아닌 방에서만 살던 사람이었다. 열아홉 이른 취직 후 기숙사를 시작으로, 스물하나에 들어간 대학에서도 일 년은 기숙사, 그다음 일 년은 친구들과 학교 앞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졸업하고 취직해서는 성수동 작은 옥탑방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이주하며, 불과 삼 년 전까지도 작은 창이 있던 기숙사에서 살았다. 문득문득 언제까지 이대로 살 수 있을까? 불안은 기척도 없이 밥을 먹다가, 커피를 마시다. 책을 읽다가도 고개를 디밀었다. 그맘때 친구를 기다리던 서점에서 공간디렉터 최고요의 책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를 샀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은행으로 가 빚을 내고, 지금의 집을 계약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오래된 아파트지만 발품을 팔고 몸을 쓰며 계절마다 집과 나를 돌본다. 오늘 자 햇살이, 집을 포근히 안는 아침. 삐거덕거리는 베란다 선베드에 누워, 식물들 사이에서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나를 떠밀던 불안과 서점에서 만난 <최고요>의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네모난 방에 나를 가두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집은 방이 아닌 지붕을 가진 나의 첫 경험. 첫 취향으로 가득한 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 어차피 혼자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