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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10. 2023

인생, 어차피 혼자다.

글을 위한 필사 <에이징 솔로, 김희경>


1인 가구의 수가 역대 최대로 늘어났지만 아이를 낳지 않고 혼자 사는 여성들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지 않았다.'라는 비난에 시달린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아이, 가족과 한 묶음으로 바라보는 밧줄 같은 시선은 내가 할머니가 되어도 올가미처럼 따라다닐 것만 같다. 청년기와 중년기에 다짜고짜 "자녀가 몇 살이냐?",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숱하게 들어왔는데. 노년기에는 자연스러운 순서라도 되는 것처럼 "손주는 몇 살이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려나. 비혼 여성이 출산하지 않은 이유는 각자의 사정마다 다르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순전히 개인적 사정이므로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 작가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이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말한 것처럼 이 질문은 "세상에는 하나의 여자만 있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는 종 전체를 위한 엘리베이터처럼 반드시 결혼하고, 번식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런 질문은 "질문자 입장에서는 정답이 하나뿐인" 닫힌 질문이고,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단언"이다.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개척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더러 너희가 틀렸다고 단언하는 말"이다. 이 해로운 단언의 흔한 변주는 "자식을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자식을 여럿 두고도 어른이 되기는커녕 성숙한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사례가 현실에 넘치도록 많아서, 나는 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관계를 맺을 줄 알게 될 때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교묘한 변주 하나는 꽤 오래 마음에 박혔다. 40대 초반 무렵, 가까이 지냈던 한 선배가 내가 아이를 낳지 않은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평생 해볼 수 있는 일 중 가장 깊고 가치 있는 경험을 네가 해보지 못했다는 게 마음이 아프다." 선배와 연락이 끊긴 뒤에도 가끔 이 말이 생각났다. 사람이 살아가는 여러 방식의 삶을 얕게 이해한 데서 비롯된 말이라는 반발심이 일면서도, 한편으로는 결핍에 대한 씁쓸한 자각과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심이 뒤섞여 종종 마음이 복잡해졌다.


김희경 <에이징 솔로_ 1.솔로로 중년되기(3.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이기적이다?)





<에이징 솔로>를 읽는 동안, 내가 수없이 들어온 단언에 가까운 말들과 그때 느꼈던 마음과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크게 공감했다. 이른바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던 때는 주변이 술렁일 만큼 결혼하지 않는 나를 안타까워했고, 모든 건 때가 있기 마련이라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의 몸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태와 낳을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갔다. 짝을 찾지 않는 건 불행한 일이고, 모두가 다 하는 것을 안 하거나 못하는 것은 이상하거나 모자란 쪽으로 분류되었다. 사람들은 멋대로 내가 불행해질 거라고 했다. 둘이 되어도, 셋이 되고 넷이 되어도 인생은 어차피 혼자 아닌가? 언제부터 결혼은 인생의 마침표가 된 것일까? 나는 찍지 못한 그 점 하나로 비정상으로 분류되어 그들의 말속에 갇혔다.​


‘그럴 것이다’는 ‘카더라’만큼 신빙성 없는 추측. ​사람들은 온갖 것에 ‘그것‘을 붙여 넣었다. 그들은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은 안정, 혼자 있는 것은 외로움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나는 극 내향인이라 먹고사는 일이 아니라면 회사에도 가고 싶지 않고(직장인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면 반드시 나만의 시간이 확보되어야 에너지가 차오르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외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향한 빈번한 단언이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들고, 인간관계 재정비의 틈을 만든다.​


가족은 가족이라서, 가까운 사람들은 가깝다는 이유로 내가 원하지도 않는 형태로 그들에 의해 구겨질 때면 빈 들판에 홀로 서 벌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확신도 없이 덜컥 모험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언젠가 그려봤던 그림이지만, 결국에 나는 '에이징 솔로'를 선택할 수도 있다. 어떤 결정을 하든 그 결정에 동반된 모든 것은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할 현실과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듣고 싶어서 책을 열심히 읽었다. 통계로 조지고 싶어서.

ᓀ_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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