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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Sep 28. 2023

더는 작아지지 않아도 되니까

글을 위한 필사 <슬픔의 방문, 장일호>


한동안 입술만 깨물던 엄마가 결심한 듯 내 손을 꽉 부여잡았다. 정작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나를 홀로 밖에 세워 뒀다. 아무렴, 나는 '심심하다'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였다. 글자라면 무엇이든 읽었다. 식당 유리에 코를 대고 메뉴판을 보려 애썼다. 유리에서는 은은하게 돼지갈비구이 냄새가 났다. 고개를 조아리는 엄마가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밀린 월급 30만 원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눈치 없이 배가 고팠다. 엄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양념치킨을 사줄 것이다. 자식 입에 들어갈 치킨 값을 계산할 때면 어딘가 당당해지곤 했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예 몸을 돌려 전봇대에 나붙은 전단지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숙식 제공, 100만 원, 아가씨 같은 글자가 또렷했다. 그날 이후였다. 하굣길마다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언제쯤 아가씨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나는 100만 원만큼의 미래를 꿈꿨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보다 더 큰돈은 내 상상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 미래에는 엄마가 30만 원 때문에 작아지지 않을 수 있었다.


장일호 <슬픔의 방문_아주 평범한 가난>






엄마는 남에게 신세 지는 일을 꺼려했다. 없는 형편이지만 그런 일이 있다면 상대가 베푼 호의를 잊지 않았고, 모른 척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엄마는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다. 집에 무슨 손님이 그렇게도 찾아오는지 방학이었던 어느 날에는 엄마의 친구라고 보기에는 위아래로 나이 차가 있는 아주머니들이 아침나절부터 집에 오는 통에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프림 없는 설탕 커피를 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칭찬에 약한 아이였기에 어른들의 '잘한다, 맛있다.'에 힘입어 커피 고유의 씁쓰름한 맛보다 당으로 점철된 어른 맛 커피를 탔고, 그들에게 건네는 것을 좋아했다. 그 일은 대단한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인 동시에 누군가의 피로를 주무르는 일이기도 했다.


그 집 아주머니도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분이었다. 엄마 아빠와 친했고, 오빠 친구의 부모이기도 했다. 그 일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벌어졌다고 했다. 병원 생활을 오래 있던 아빠 때문에 엄마는 급하게 얼마의 빚을 내 병원비를 갚아야 했는데, 그 빚 160만 원을 꿔준 사람이었다. 한밤에 느닷없이 그 집 아저씨가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쳤고, 주워 담기 힘든 말들을 쏟아 냈다고 했다. 그 집에는 엄마뿐이었고 그 일이 있던 시간은 깊은 밤이었다. 아무리 아는 사이라 한들 상대방의 고압적인 태도에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는 왜 그런 식이어야 했을까? 주취자의 행동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후에 엄마는 자신의 처지가 부모를 잃은 심정 같았다고 했다. 남편을 잃고 나니, 남자 없는 집이라고 자신을 얕잡아 보는 것만 같았다고. 엄마는 그 밤에 남의 집 남자의 폭언을 들으며 울었다.


그 일은 다음 날 회사에 다니던 작은 언니가 준비해 간 돈을 그 집 방바닥에 던지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구구절절 가슴에 박힐 말들을 쏟아붓고도 언니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고 했지만, 와중에 나는 그 얘기를 입을 벌리고 들었고 속으로 그녀와 원수가 되진 말아야겠다는 작은 다짐을 하기도 했다.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가 돈 160만 원에 허물어지던 그날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시에는 엄마의 억울함보다 언니의 기세에 눌려 어떤 말도 하지 못했지만 얼마간 그 집 방에 나뒹굴었을 돈을 주웠을 부부를 생각하니 묘한 쾌감이 들기도 했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건 돈이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뜻대로 풀리는 것 없던 시절 나 또한 엄마에게 부재자로 존재했으니, 건넬 수 있는 말 또한 부재의 몫으로 밀어두었다. 사는 건 때때로 누군가의 바닥을 확인하는 일. 배반하고 등 지는 일, 하소연으로 얼룩지는 일, 그러다 때론 드물게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


어느 날 엄마는 그 집 아주머니 얘기를 조금씩 꺼냈다. 자꾸만 집 앞에 무언갈 두고 가 마음이 불편하고 돌려주려 해도 받지 않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며 또 마음에는 그때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 한편으론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괴롭다는 거네?” 하자. 엄마는 “그렇지”하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사과는?”하고 묻자. “하더라고 “ 했다. 이후로 아무 말이 없었지만, 엄마는 이미 그들을 용서한 것 같았다.


엄마는 이제 작아지지 않아도 된다. 호시절이 드문 때였지만, 뭉뚱그려 슬픔으로 치부하기엔 드물게 좋은 일도 있었기에 견딜 수 있는 시간이었다. 놓을 수 있다면 그런 기억은 떠나보내는 편이 훨씬 나았다. 없던 일처럼 될 리 없겠지만. 그런 노력만으로 드물게 옅어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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