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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il Oct 03. 2023

애정과 애증사이

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S


길고 길었던 장마가 잠시 숨은 날, 아침 8시 낮 12시 사회인 야구를 두 개나 해치우고 집에 온 그의 얼굴에서 날씨를 실감하며 “무리하지 말라"라는 듣지도 않을 잔소리를 하고, “너무 힘들다"라는 레퍼토리를 들으며 핸드메이드 수박 주스를 건네고 돌아오는 평을 기다렸다. 덥고 습하고 요란한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그날 우리 점심 메뉴는 짜파게티였는데 그가 집에 도착하기 2시간 전, 냉장실에서 꺼낸 소고기는 키친타월로 핏물을 제거하고 소금과 후추를 입힌 후 올리브오일을 넣어 조물조물 마리네이드를 해둔 상태였기에 야구복을 벗고 짜파게티 요리사로 분한 S 옆에서 준비해 둔 채끝을 구울 수 있었다. 고기 한 면을 구울 때마다 정확한 시간을 재기 위해 아이폰으로 2분 10초씩 알람을 설정하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 어쩐지 장인의 품격이 묻어나 스스로가 대단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오늘의 짜파게티 요리사는 자기 요리가 불어 터질까 초조해하며 테이블에 앉아 "어서 오라" 소리치고 있었다. 성화에 못 이겨 잠깐의 레스팅을 마친 고기를 썰어 후다닥 갔을 땐, 그가 끓인 짜파게티는 이미 불어있었다. 어쩐지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통통한 면에 고기를 싸 먹는 마음으로 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철 지난 드라마를 보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맥주까지 곁들이니 집으로 떠나는 휴가는 이런 풍경일까? 급변하는 드라마 속 인물들을 바라보며 변수 없이, 평온한 오후가 지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바닥에 앉아 쿠션을 껴안고 있었고, 그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려 몸을 일으켜 세우는 동작을 왜인지 부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우당탕 바닥에 드러누워 주름 주름진 얼굴로 "다리에... 즈으이으이..."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놀라 "뭐야?" 하는 내게 다시 한번 고통을 호소하며 쥐어짜듯 "다리에 쥐으이이" 그제야 우당탕 의미를 제대로 해석한 내가 그의 다리를 세우고 발가락을 발등 쪽으로 꺾어 나름의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는데, 오른 다리를 마치고 내려놓으니 왼 다리도 왔다고 해서, 급히 옮겨 왼 다리를 들자, 악! 소리와 함께 그는 온데간데없이, 웬 하회탈이 우리 집 거실에서 상체는 오른쪽, 하체는 왼쪽으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워 그때부터 나는 대놓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회탈이 “웃지마아아아아.”하며 절규했고, 나는 알았다고 해놓고 배꼽이 떨어져 나갈 만큼 또 웃었다. 눈물을 닦으며, 마그네슘, 에드빌을 각 두 알씩 챙겨 와 못 일어나겠다는 그의 손을 끌어 간신히 먹였더니, 도로 누워서 여기, 여기 하며 엄마 어깨를 주물러 줄 때나 듣던 주문에 어이없음과 웃음이 뒤섞여 어휴, 하면서도 조물조물 힘을 실어 안마를 마치자, 눈물 나도록 웃겼던 우당탕 소동이 잠잠해졌다. 후에도 그는 거실 바닥에 삐딱하게 누워 인심 쓰는 척 소파는 나더러 쓰라며 한참을 그 상태로 누워 있었다.


나 역시 운동을 과하게 한 적이 많아 종종 헬스장 바닥에 누워 응급처치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웃지 않고 뭉친 다리를 풀어줬던 트레이너들은 사실은 직업 정신이 엄청났던 것일까 생각하며 나의 웃음은 전문성과 동떨어져 있으니 아무렴 어때? 하며 좋을 대로 생각했다.


그는 테이블과 소파 사이 좁은 공간에서 끼여서 잔뜩 구겨진 얼굴로 식식대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냐는 말과 너무 아팠다는 말을 번갈아 가며 도리어 나를 흘겨보았고, 나는 살려 줬더니 이제 와 웃는 걸 갖고 뭐라 한다고 덩달아 눈을 흘기며 입술을 샐룩거리다 이번에는 같이 웃고 말았다.


그는 자신에게 온 양다리 쥐가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소싯적 무리하고도 끄떡없던 젊음이 그리웠는지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보며 “어떻게 이럴 수 있지?”라며 충격에 빠졌고, 그제야 나는 웃음기 없이 “그러니까 쉬는 시간 없이, 전날 필드까지 나가래? “하며 걱정에 가까운 핀잔을 덧붙였다. “그게 맞겠지?” 누구에게 대답하는 건지 모를 말을 허공에 던졌다. 달처럼 기운 그 옆모습을 보니 조금 짠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이 밖은 옅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드라마는 계속되었다. 다시금 평온이 찾아왔지만 한바탕 웃음 뒤로 남겨진 씁쓸함이 입가에 남아, 지난날 나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된 '오래오래 좋아하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를 S에게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차고 넘치는 호승심을 빼면 비슷한 것이 거의 없는 우리라서, 어쩐지 내가 하게 될 말이 그에게 닿지 않을 것 같아서, 그저 오늘과 같은 날이 또다시 오면 조금 덜 웃으며 뻣뻣해진 근육을 조물조물 풀어주자고 마음먹었다.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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