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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Feb 02. 2021

보험과 운명론

이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8년차. 어떤 사람이라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되기도 하고, 어떤 직업을 갖게 되어서 어떤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손해사정사는 전화를 많이 받는다. 그 전화 통화 중에는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도 많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보지 못할 내용들도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전화는 암 진단금 분쟁으로 인해 진행 중이었던 의뢰인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 상식적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상식적인 기준인 민법, 보험관련법 등에 기초해서 어떻게 처리하고 대응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 나의 업무가 될 때가 많다. 매우 상식적인 일들은 대부분 그에 따른 문제나 분쟁이 생길 가능성도 적으니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연들을 접하면서 나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서 흥분하며 설명하는 사고당사자 또는 그 주변인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매 순간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운명론자가 되어간다. 내가 듣는 사연들은 하필 직전 근무 교대자가 소홀히 한 전압단자 때문에 사지에 장해 80%를 입은 사연부터 친구랑 함께 즐기러 간 골프 라운딩에서 친구의 골프채에 눈을 맞아 안구를 적출하여 실명하기도 하고, 가족들과 식사 중 쓰러졌다가 눈 뜬 병원에서 뇌종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등이다.



그들에게 나는 향후 어떻게 하면 가장 나을지를 설명해줄 수 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의 축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다. 지난 주 수임을 한 교통사고 피해자는 40대 후반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경제난으로 하나 있던 실손보험까지 얼마 전 해약했고, 경제난으로 책임보험만 겨우 가입한 이웃에게 자동차사고를 당해 여생을 병원에서 보내야 한다. 책임보험의 초과 손해에 대하여 책임보험가입능력 밖에 안 되는 가해자에게 직접 청구하여 얼마나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피해자의 대리인으로 나선 형은 동생의 이웃을 가해자라 부르지 말아 달라했지만 나는 입에 붙은 그 표현을 자꾸 반복했었다. 가해자가 이웃사촌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왜 하필 그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가해자로 만나서 배상조차도 받을 수 없게 되었는가? 이왕이면, 비싼 차량의 소유주를 가해자로 만났더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나는 이렇게, 이러한 일들을 만나면서 점점 운명론자가 되어간다.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직업인 나도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 앞에서 아무 대책이 없다. 단 한 번도 사고를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생각조차 안 해본 사람도 그렇다. 자신의 조심으로 막을 수 있었던 사고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매우 많다. 그렇기에 배상에 대한 분쟁이 계속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고의 가능성에 대해 단지 운 없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에피소드나 TV 드라마나 영화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고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연 많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위에서 언급했던 교통사고의 경우 피보험자가 실손보험만 있었더라도 상황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현재 전원이 필요한 상황에서 환자의 병원비 지불능력 때문에 전원할 병원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만약 그 흔하디흔한 실손보험이 유지되고 있었더라면 전혀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수임을 해놓고도 문득 문득 피해자한테 화가 난다. 실손이라도 유지하지 그랬어요? 그런데 피해자는 기억력을 관장하는 해마 손상으로 대화 진행이 불가한 상태다. 내가 대화를 할 수 있는 피해자의 형님의 심정은 나보다 더할테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객관적이고 분석적이어야 해낼 수 있는 일 속에 파묻혀 사는 이수현 손해사정사가 사건, 사고들 앞에 운명론에 대한 굴복을 반복하면서도 아직은 완전한 운명론자가 아닌 이유는 어차피 일어난 일이나 어차피 일어난 일에 대하여 사람은 보험이라는 것을 준비할 수 있고 어떻게 활용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보험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고 이후에 사고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했으면 한다.



사고의 가능성 앞에 절대로 자만하지 말라. 제발!!!





이수현 손해사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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