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 있어서 당신은 충분하다

by 이현조


사람이 보험이다.29

거절이 있어서 당신은 충분하다



사무실 이사를 했다. 회사를 시작하고 5번째 이사다. 처음에 동네 부동산에서 버린 책상을 주워다 시작한 사무실에 살림이 제법 늘어서 이번 이사에는 탑차 한 대로 부족했다. 왜 이렇게 이사를 많이 하냐는 사람도 있지만, 항상 나에게는 내가 나아갈 방향에 맞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어느 순간 이 자리를 벗어날 때가 왔고,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일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결정은 지금까지는 항상 옳았다. 하지만, 언제나 영원히 그곳에 머물 것처럼 창틀 구석구석의 묵은 먼지를 모두 제거하고 화장실의 벽타일까지 광이 나도록 닦고 1층일 때는 길을 치웠고 아닐 때는 전체 복도 청소를 했다. 떠날 때 언제나 아쉬움이 없었고, 돌이켜보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던 일과 내가 해야 했던 일들이 다 끝날 때쯤 결정을 해왔고 내가 떠나는 곳에 이사 들어가면서 다음 이사 조건으로 생각했던 곳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이번 이사를 결정하면서 깨달았다. 그런데 이번 이사의 결정은 이유가 이전 이사와는 좀 다르다. 그전에는 이제 여길 떠날 때가 왔다는 알 수 없는 손짓 같은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여길 벗어나야만 한다는 결정이었다.


이사 들어갈 때부터 임대인이 바로 옆 사무실을 사용한다는 게 맘에 걸렸다. 하지만, 임대료 안 밀리고 사무실을 깨끗하게 사용하면 별문제 있으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아주 엉뚱하고 예상치 못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임대인의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문을 여닫는 소리가 힘들다며 정기적으로 찾아왔다. 그때마다 알겠다고 돌려보냈는데 어느 날 도대체 문을 어떻게 닫았으면 좋겠냐고 하니 시범을 보이는데 이건 내가 아기 키울 때도 해본 적 없는 정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기준이 이거라면 내가 조심하지 않거나, 가벽이 얇아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연히 항상 모자를 쓴 그녀의 탈모를 알게 된 후에는 그녀의 모든 예민함이 내가 문을 여닫을 때마다 원망과 분노로 표출될 거라는 생각에 맘이 편치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그녀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생각이 없으면서도 사무실 문을 열 때마다 그녀의 짜증난 얼굴이 떠오르고 압박감이 들었다. 나뿐 아니라 직원들도 사무실 문을 열 때마다 맘이 너무 불편하다고 했다. 결국 내가 떠나야 그녀의 고통도, 당연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문 열기’를 할 때마다 오는 압박감도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 이사를 결정하였다. 문을 여는 그 순간 나의 공간으로부터 환영받고 싶었다.


지난달 이사를 했고 문을 여닫는 나와 직원은 같은 사람인데, 문소리에 항의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래층에서 층간소음이 심하니, 하이힐은 좀 피해달라는 황당한 부탁을 받았다. 어차피 하이힐은 잘 안 신어서 별문제가 없지만, 여기서는 여기에 따른 다른 모양의 불편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사무실에서는 복도 청소 상태가 엉망이어서 내가 매주 청소를 했는데 여기는 복도가 없는데 분리수거장이 엉망이라 내가 대용량 종량제를 사다가 한참을 치웠다. 아마, 여기서는 분리수거장이 내 몫이 될 거 같다. 전 사무실에서는 밤 10시면 출차를 해야 하는 주차장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경사진 주차장이 매우 불편하다.


아직은 문을 열 때마다 “여긴 괜찮지?” 하는 안도감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그녀는 사무실이 비어서 이제 좀 마음이 편안해졌으려나 생각하곤 한다. 전에 있던 사무실에서 느꼈던 문제를 피해서 이사를 왔지만 여기도 문제는 있다. 다만, 내가 그 문제를 문제라고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전 사무실은 주말에 냉난방이 안 돼서 힘들었고, 그 전전 사무실은 내 방이 없어서 힘들었고, 그 전전전 사무실은 집이 너무 가까워서 업무에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머무는 동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고 해결하는 에너지를 다른 것으로 옮겨야 할 때가 되어 나는 떠났던 것이다.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문제라는 것은 결국 갯모밀을 길에서 보느냐, 도자기에 심느냐와 같이 내가 어디에서 어느 시각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 문제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일지 여부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에 감사할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붙잡고 괴로움 안에 나를 가두어 놓을지 결정할 수 있다.


영업을 잘하는 사람들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그거였다. 고객의 거절을 내 괴로움으로 마음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오늘 거절하는 고객을 만나면 내일 다른 고객을 만날 생각에 설레일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고객은 언제나 거절할 수 있고 거절은 당하는 게 아니라 그가 하는 것이고, 거절이 100번이어도 당신의 직업은 보험설계사이고 나는 보험사가 보험금을 안 줘도 손해사정사다. ‘거절’이라는 게 존재하니까 보험사가 영업사원이라는 역할이 존재하는 것이고 모든 보험금심사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손해사정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일어나는 문제들 속에 있으나 이미 충분히 잘 존재하고 있다. 매일, 매일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둘러싸인 당신을 축하합니다.


야외에서도 잘 자란다고 해서 언젠가 시골 산에서 본 듯한 갯모밀이라는 화초를 사서 도자기에 심어서 세면대 앞에 놓으니 제법 멋지다. 전 사무실에서 여기저기에 걸어놨던 그림을 한데 모아 걸었더니 이사 전에도 왔던 사람이 그림이 왜 이렇게 많냐고 한다. 공간이 달라졌기에 같은 가구로 배치를 다르게 했는데 이렇게 좋은 가구가 있었냐고 한다. 전용 화장실이 생겨서 좋은데 화장실 청소라는 미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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