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보험이다.31
그래도, '폭삭 속았수다'
요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대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도에서 10대 때부터 순수하게 사랑해서 결혼한 애순과 관식, 그 가족들과 주변 인물의 삶을 그려낸 드라마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서 자기 엄마를 보았고 자기 아빠를 보았고 자기 할머니를 보았고 혹은 자기의 첫사랑을 봤다고 한다.
나는 그 드라마의 성공 요인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내 주변 사람들의 인생을 특별하게 보이게 그려낸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남존여비, 남아선호 사상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고 그로 인해 여성이 희생되는 것도 그중 장녀가, 장남이 원죄를 갖고 태어난 것인 양 가족의 짐을 지는 것도 당연하고 흔한 일이었고 그 가해자인 종가 어른이나 시어머니도 과거에는 피해자였다는 사실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것도 당연했고 시골에서 대학을 보내려면 기둥뿌리를 뽑지 않는 것은 도둑놈 심보였다. 그 당연한 부조리와 고통스러운 일들이 드라마 안에서 특별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것은 그 부조리들에 대한 저항도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도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순과 관식이 시집살이에 대해서 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으로 대응했다면 어른들은 그들 인생에서 가해자가 되고 그들은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살던 방식 그대로 자연스럽게 그들을 억압하는 어른들 앞에서 그들 사랑의 굳건함을 보임으로써 억압에 대항하고 당연한 듯 채워졌던 족쇄를 풀어나갔고 결국에는 억압하던 어른들로부터 응원을 이끌어 낸다.
애순은 시집살이를 관식의 사랑과 마지막까지 애순을 걱정한 엄마의 사랑으로 극복해 냈고 금명의 꿈이 실현되기 위해 자신의 삶이 소모되어지는 것을 소모가 아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바탕에는 애순이 과거에 받은 사랑이 있었고 애순은 그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희생을 기쁘게 감당해 낸다.
오늘 아파서 결국 사무실에 가지 못했다. 나는 일어나서 아프기 때문에만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일들을 하나씩 했다. 평소엔 나를 위해 요리하는 게 귀찮아서 라면 정도만 먹는 내가 나를 위해서 된장찌개를 끓였다. 소고기를 정말 잔뜩 넣었다. 평소에는 고기를 넣고 찌개를 끓이면 아들 그릇에 잔뜩 고기를 덜어주고 남편이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혹여 서운해할까 남편 그릇에도 후하게 고기를 건져 덜어주고 나면 내 그릇에 담긴 고기는 맛보기 정도다. 하지만 그걸 눈치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은 온전히 나만을 위해서 고기가 잔뜩 들어간 찌개를 끓이고 따뜻한 밥을 해서 찌개에 들어간 고기를 온전히 나 혼자 차지하고 먹어본다.
혼자 걸어서 한강변을 다녀왔다. 산책하기 좋은 봄 날씨라는 말을 전화 통화하면서 인사말로 건네지만 정작 나는 산책이라는 걸 언제 해봤는지 기억도 안 난다. 산책을 하니 허리가 오히려 덜 아프고 열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아픈 덕분에 누려보는 호사였다. 나는 매일 매일 아픈 사람, 사고가 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류로 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서로 쓰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보험금을 계산한다.
진단명도 제각기 다르고 각자 가입한 보험상품도 다 다르지만, 나는 그 각자의 사정보다 그들이 자신의 고통 앞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인지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구분하게 된다.
자신의 불행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크기는 사고의 크고 적음에 비례하지 않는다. 반비례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다친 것보다 자신이 다쳐서 생계가 위험해질 가해자를 걱정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많이 다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해자가 자신에게 와서 빌고 또 빌어야 한다며 분노한다. 그런 경우 중 어떨 땐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의 삶을 온전히 망가뜨리려는 가해자로 보이기도 한다. 한 예로 어떤 할머니의 교통사고에서 공무원인 가해자를 할머니의 가족이 형사합의를 무기로 너무 괴롭혀서 가해자는 정신적 고통으로 회사를 관두는 지경에 이르게 한 사례도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환자들이 누군가는 자신이 휠체어가 굉장히 빠르다며 자랑하고 어떤 환자는 휠체어에 의탁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휠체어에 앉아서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포기한다. 어떤 암 환자는 자신을 암에 걸리게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줬던 누군가를 자신의 삶 속에서 기어이 찾아내서 내내 원망하며 지내고 어떤 암 환자는 자신이 회복해서 사랑해줘야 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고마워한다.
손해사정사로서 십 년을 넘게 살아보니 사건 사고의 발생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사건 사고 앞에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를 예상해 보려고 하게 된다. 그건 보험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보험금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자신의 나머지 삶을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사람들은 보험금이 많았더라면 그들이 행복해졌을 거라 생각이 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보험금이 경제적 삶의 질을 지켜주는 중요한 수단임은 매번 확인하지만, 사고 이후의 진짜 삶의 질은 돈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 불행이 아닌 것을 불행으로 만드느냐, 당연히 불행해야 할 것 같은 일 앞에 다행을 찾아내느냐의 차이였다. 그리고 다행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일을 할 때 보험금이 다행의 가치를 더 확대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진다.
그래서 나는 아프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아픔이나 어려움이 아니라 아픔과 어려움의 가치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오늘 이불 속에 누워서 신체의 고통에 집중하지 않고 오랜만에 혼자 오롯이 집에 있는 시간에 집중하려 하고, 전화를 못 받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음에 안심하고 걸려오는 전화들을 안 받고 나의 생각에 집중하고 컨디션이 악화된 모멘텀을 찾아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반성해 본다.
너도 큰일 당해보면 쉽지 않을걸? 하고 말하고 싶을 수 있다. 맞다. 아무리 많은들 간접경험과 직접 겪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던가, 나는 정말 의연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인생의 필수템이라면 사건 사고가 아닌 그 사건 사고가 가져오는 선물 같은 옵션들을 오히려 환영하고 사랑하는 특별함에는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내가, 당신이, 당신의 가족들이,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감동하는 그 이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