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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Feb 08. 2021

새 시어머니와 설 명절 보낸 후


연휴 잘 보내셨나요? 저는 예상대로 새 그릇에 밥을 못 먹었습니다. ^^

명절을 보내면서 집안마다 무언의 규칙 같은 게 생기죠.

저희 시댁은 두메산골이라 아직도 아궁이가 있고 명절이면 돼지를 잡습니다.     

전은 많이 안 부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다른 메뉴를 끼니마다 하는 덕에 항상 연휴 끝자락에     

애물단지가 되는 전과 나물 때문에 고민하다가 저는 명절날 아침상을 치우면     

 남자들을 산에 보내고 전과 산적, 나물로 김밥을 쌉니다.     

애들은 물론이고 시댁 식구들이 모두 김밥을 좋아해서 20줄 넘게 싸야하지만     

간단한 점심해결과 음식이 남는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그 다음은 잡아서 내장만 손질해서 덩어리째인 돼지고기입니다.     

해야하는 음식의 양은 어마어마한데 손질하지 않은 고기를 찌개용과 구이용 등을     

필요한만큼씩 손질해서 요리를 해야합니다.     

제가 결혼 전에 정육점에서 꽤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덕에 20-25근의 구이용 고기를 명절마다 손질하고 있지요.     

구이용, 찌개용, 장조림용으로 손질해서 놓는데 구이용으로 썰어놓는     

삼겹살과 목삼겹은 가장 큰접시위 6-7센티가 쌓이고 앞다리살이나 뼈에 붙어 있던 살은     

찌개를 끓이면 부드럽지요. 등심, 안심, 사태는 장조림을 하면 한솥이라     

명절 내내 밑반찬으로 먹습니다. 제 장조림은 남으면 시누들이 집에 싸가는 인기메뉴지요.

구이는 항상 참나무를 숯으로 만들어서 마당에서 구워 먹는데     

요건 막내 아들인 우리 남편의 몫입니다.     

그럼 그 위에 마침 먹기 좋게 숙성된 돼지고기가 익고 신김치에 제가 준비한 양파채무침에     

젓가락이 막 무섭게 움직이면 빈 그릇만 남고 그걸 치우면 명절 하루가 갑니다.   

  

누가 하라고 한것도 아니고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냥 저는 김밥을 하게 되었고 고기는 제가 썰고 불은 남편이 피워야 하고     

장조림도 제가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김밥을 싸지 않아서 전과 고기산적과 나물을 질리게 먹다가     

버리게 되고 내가 썰지 않아서 삼겹살인지 엉덩이살인지 모르고 그냥 구워먹고     

내가 장조림을 하지 않아서 퍽퍽한 등심으로 찌개를 끓여먹는다면 어떨까?

뭐 큰일 나나?

김밥을 싸지 않으면 그냥 점심에 있는 국에 반찬 내어서 점심 먹고 내가 손 아프다 안 썰면     

힘센 남자들이 썰 것이고 장조림은 없어도 밥 못 먹는 거 아닌데.     

내가 왜 사서 안해도 되는 내 역할을 만들어놓았나?

시작하지 말걸 그랬나.     


그러다가 처음 시작한 이유들이 기억났습니다. 음식 버리는 거 싫어서 김밥을 생각해냈고     

맛나게 멋지게 먹는 게 중요해서 이리 될 줄 알면서 시집 온 첫해에 만류하는 남편을 뿌리치고     

큰 칼 들고 나섰고 식구들이 좋아하는 구이랑 찌개 해먹기에는     

영 맛없는 등심이랑 안심 맛나게 먹는 법이 장조림이라서 했지요.     


그랬더니 모두 좋아하고 저도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당연해진 지금은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기다립니다. 제 역할을.     


처음 시집 와서 시누들 곁에 자는 것이 너무 불편해서 결국 남편 차에서 잤었더랬죠.     

당최 어디 머리를 두고 어디 발을 뻗어야하는지 말 그대로 누울 자리를 알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랬는데 10년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이제는 서로 말없이 하고 받아들이고     

기대하는 제 역할이 있네요.    

 

결국은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인연을 맺고 인연 속에서 자기 할 도리를 해나가는 건     

이런 자리 만들어나가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자기 역할과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죠.     

만약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하는 인연이면 멀어지고 할 수 있는 것을 해서     

깊어지는 인연이면 가까워지고 오래오래 남겠죠.     


우리가 고객들 만나서 하는 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객이 필요로 하고 받아들여주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으면서     

고객이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찾고 수행하면서 서로한테 자리가 생기고 역할이 생기고     

그걸 기대하는 사이가 되고 그 기대를 오랜 기간 서로 충족하면 윈윈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죠.   

  

어떻게 하고 계세요?

어떤 자리와 어떤 역할이 생기고 어떤 기대를 주고계세요?

혹시 고객의 마음자리 값으로 저처럼 버거워하면서 후회할 역할과 기대를 주고 계시지 않나요?     


지금은 좋지만요. 계속 할 수 있고 상대의 기대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당신도 좋을 그런 것인가요? 시댁은 가끔 가지만 일은 매일 해야하니까.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요.

저도 오늘은 제 자리에서의 제 역할과     

그에 대한 상대의 기대가 합리적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반성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김밥 20줄 싸고 고기 20근 써는 거 쉽지 않아요. 손이 엄청 아픕니다.     

하지만 맛있다는 칭찬은 달콤하고 이번에 왜 안했냐는 서운함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관절염 검사까지 받을 정도로 아픈 손으로 막내며느리는     

계속 김밥 싸고 고기 썰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고객들한테 김밥 20줄 돼지 20근 멋지게 썰어주고 계신가요?     

다음 명절에도, 그 다음 명절에도, 또 그 다음 명절에도 썰면서 당신이 기쁠까요?

당신 손이 지치지않을까요?     



고객을 만족시키는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해피~연휴 종료~     

당신의 눈과 귀를 열어주세요.


 - 2015년 이수현 손해사정사가 씀 -     


(2015년의 이수현 손해사정사가 코로나19로 설날에도 가족들을 만나기 어려운 분들의 가족사랑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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