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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Feb 14. 2022

기억력이 아버지를 닮았네


처음 글을 써서 칭찬을 받았던 때가 기억이 난다. 중학교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내 상장을 보고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아버지는 “글 잘 쓰는 건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문예부에 들어갔다.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딱히 잘하거나 흥미 있는 게 없어서였다. 문예부를 맡은 국어 선생님은 시간만 보내지 말고 진짜 성과를 내보자고 하셨고 문예부원 일곱명은 모두 1년 동안 단편소설을 한 편씩 써서 완성을 해냈다. 그걸 다시 엮어서 문집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전국 단위 청소년문학상에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2학년 가을부터 도전했던 문학상에서 본선에 진출했다는 연락이 왔다. 한 곳은 서울에 있는 한 대학의 청소년문학제였는데 다른 문예부원 2명도 함께 본선에 진출하여 소풍 가듯 내가 살고 있던 경기도에서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물어물어 교복을 입고 다녀왔다. 도대체 무슨 건물이 그리 많은지 문학제를 치르는 장소를 찾을 수가 없어서 무척 헤매었고 끝나고 나서는 대학 매점을 가보겠노라 셋이서 헤매다 결국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작은 가게에서 라면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다시 한 군데에서 더 연락이 왔는데 이번에는 나만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이 치러지는 장소는 대전이었다. 대전에 가려면 내가 사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을 이동해서 전철역이 있는 곳으로 가고, 거기서 전철을 타고 1시간 더 가서 서울역에 도착하고, 다시 기차로 2시간을 더 가야 했다. 그리고 대전역에서 대회가 열리는 학교로 이동해야 했다. 넉넉잡고 5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안심하고 도착할 수 있었다. 대회 집합 시간인 아침 9시에 도착해야 하는데 우리 동네 첫차는 5시 30분이었다. 대회에 참가하려면 택시를 이용하거나 누군가가 운전을 해서 나를 전철역까지 데려다줘야 했다.



부모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참가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차피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아봤자 글쓰기는 돈이 안 되는 재주이고 여자가 그런 재주 인정받아봤자 바람만 들어 취직은 안 하고 꼴초돼서 폼만 잡다가 결국은 인생 망친다는 것이 아버지의 논리였다. 어머니도 굳이 그게 새벽에 피곤한 아버지 운전시키고 왔다갔다 기차삯을 써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반대를 하셨다.



여기까지 읽은 여러분들은 내 나이가 갑자기 궁금해질 것이다. 이때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서태지가 내 또래의 우상이었고, 우리는 노래방에서 신해철의 ‘날아라 병아리’를 부르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삼겹살 먹을 때 고민하지 않았었고 과일도 박스로 사서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나는 부모님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방법도 없었다. 그리고 부모님한테 거절당한 것보다 힘들었던 것은 부모님이 저런 이유로 내가 대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셨다는 것을 담임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믿지 않으시면서 생활기록부 가정 형편란을 펼쳐놓고 대회에 나가기 싫은 이유가 뭐냐고 물으셨다. 급기야 내가 거짓말을 한 거라면서 어머니와 직접 통화를 하시고 나서야 내 말을 믿어주셨다. 나도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선생님도 직접 듣고서는 할 말을 잃으셨다. 나는 혹시나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하실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전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매우 단호했다. “선생님, 저는 제 딸이 글짓기 잘하는 거 싫습니다. 그런데 쓸돈 없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의 도움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고 입상해 문학상에서 발간하는 문집에 내 이름과 작품이 수록되었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전국대회 문학상은 처음이라며 전교생들 앞에서 칭찬과 격려를 받는 영광을 누렸고, 무엇보다도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소유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대회 당일 새벽에 늦지 않게 깨워주시면서도 기차삯은 어찌 마련했는지 묻지 않으셨고 상을 받았다는 말에도 아무 반응이 없으셨다. 상식적으로 어머니의 기쁨이어야 할 것 같았던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에 대한 냉대에 상식적으로 서운해야 할 것 같은 나 또한 아무 반응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전교생들 앞에서 교장 선생님께 내 재주를 칭찬받았던 그날 이후 나는 나에게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에 흡수시켰던 것 같다. 이 모든 시간들이 언젠가 내가 쓰게 될 글에 배어나게 될 재료일 뿐이라며 아파해야 될 것에 대해 애써 냉소적이거나 무반응했었다. 나는 그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에 기대어 살면서 어른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에 기대어 내가 일하면서 만나는 인간의 생로병사와 사연을 흡수하고 칼럼으로 기화(氣化)한다. 내 업을 ‘글 덕분’에 직관적으로 관찰하는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



여자가 글재주 좋아봤자 꼴초 돼서 인생 망칠 거라던 아버지에게 내가 쓴 책이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아버지가 “잘했구나”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기억력이 나쁘다. 아버지는 누구 좋으라고 보험을 넣냐고 보험을 해약하게 했던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고 나이 먹으니 보험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신다.



나도 아버지처럼 기억력이 나쁘다. 글을 못 쓰게 하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는데 2주마다 돌아오는 칼럼 원고 마감이 반갑지만은 않다. 보험을 해약한 아버지가 미웠는데, 불평하면서도 보험료 밀리지 않고 내는 아버지한테서 딸자식 부담 덜어주려는 무심한 사랑을 나는 느낀다. 나 대전 갈 때 선생님들께서 기차삯이랑 가락국수 사먹으라고 모아주셨던 5만원을 못 갚았다는 것도 이제껏 잊고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다. 그 5만원 덕분에 ‘내가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선물받았는데, 그 덕에 내가 어른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도 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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