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근육 11
할머니에게도 없는 치부책이 나에겐 있다. 기록할 만큼의 돈거래(置簿)를 해본 적은 없다. 나의 치부책은 진짜 '치부(恥部)'를 담은 책이다. 이십 대 초반부터 쓰기 시작한 이 노트는 당시 집 근처 학용품과 문제집을 팔던 여느 고등학교 앞 서점에서 집어 든 캠퍼스 노트로, 종이마다 삼 색으로 인덱스 표시가 되어 있을 정도로 꽤 두툼하다. 노트는 책상 바로 옆, 정면을 바로 보며 세워진 낡은 책장의 위에서 네 번째 칸 가장 맨 오른쪽 끝에 낑겨있다. 노트 옆으로는 삼만 개가 넘는 단어가 수록된 보카(그땐 이렇게 부르는 책이 뭔가 신뢰도가 높았다) 영단어 책과 영미문학의 이해라는 고리타분한 수업을 들을 때 사용했던 NORTON(노튼 / 영문학도라면 모두가 알고 치를 떠는, 하지만 왠지 버릴 수 없는 벽돌책)이 꽂혀있다. 그래서인지 노트는 있는 힘껏 찌부러져 스프링 달린 노트가 그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단언컨대 최고의 치부책 위치라 자신한다.
이따금 나조차 잊어버리고 싶은 사건이 있다. 그런 일들은 보통 창피하고 부끄러운 [치부] 카테고리에 위치했다. 나의 치부책에 적힌 이야기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사건 자체가 쪽팔린 것. 그러나 이것은 나이가 들며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염치 덕분에 하루 이틀이면 잊어버릴 수 있는 경도의 일이다. 둘째는 돌아보니 쪽팔린 것. 특히 '애정'의 영역이 그랬다. 당시엔 [로맨스]였겠지만 지금은 [상영불가]의 낙인을 찍어버린 것이었다. 이것들은 겪지 않았으면 않았지, 이미 내 삶 가운데 방점을 찍어버린 이상 침을 묻혀 아무리 문대봐도 완벽히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반 사람들보다 기억력이 미세하게 좀 더 좋은 나(주관적)는 그때와 비슷한 온도, 습도, 분위기, 냄새, 단어, 물건만 봐도 그 기억을 아카이빙 된 창고에서 단번에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 깨달은 것은 '글자'가 아닌 이상 모든 것을 CMYK로 찍어낸 듯 생생하게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생에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굳이, 아니, 일부러 적지 않았다. 어딘가에 쓰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거머리같이 끈질겨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무한히 재생될 때도 있었다. 아무리 망각의 힘을 빌려도 자기 전 이불을 대차게 차야하는 부끄러운 일들은 존재했고 결국 괴로워져 노트에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기고 싶지 않을 만큼 초라하고 부끄러웠던 일련의 일들을 노트에 하나씩 적어 내려가는 순간, 나는 그 시간 또한 나의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내 글씨체로 적혀있는 채로 마주하는 것이 쉽진 않았다. 그렇지만 드물게 삶이 내 편이 아니라 느껴질 때 그 노트를 몰래 꺼내 스탠드 조명 아래서 조용히 읽었다. 지금 보니 지질해도 당시엔 절절했을 이야기들 가운데 어찌 됐든 내가 서 있다. 애물단지 같은 감정들이지만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게 치부책을 쓰게 된 단순하지만 확고한 이유다.
작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사건(영화 '레벤르망'의 원작)'은 1960년대 여자로서 겪은 한 사건에 대해 담담히 혹은 담대히 써 내려간 작가의 자전적 수기다. 삶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던 그때를 복기하며 쓰는 이 글은 8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정도이나 그 일을 직접 겪은 그녀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결국 그녀를 작가로 만들었다. "계속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아무런 확신도 없이", "그저 그 사건에 대해 쓰고 싶다는 욕망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녀는 끔찍했던 그 시간을 복기하며 죽을 것만 같은 구토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활을 걸고 써내려 간다.
그 시절로 다시 한번 빠져 들어가, 거기에서 찾았던 것을 알고 싶다. 이런 탐사는 내 안과 밖에서, 단지 시간에 갇혀 있었을 뿐인 사건을 유일하게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틀 안에 기입될 터다. 당시 몇 달 동안 꾸준히 메모한 수첩과 내면 일기들은, 사실들을 설정하는 데에 요구되는 필연적인 지표들과 증거들을 제공해 주리라. 각각의 이미지와 ‘다시 만난다.’라는 육체적 감각이 느껴질 때까지, 그리고 몇 개의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까지, 무엇보다 “바로 이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이미지 하나하나 속으로 내려가 보려 할 것이다. - p.19 / <사건>, 아니 에르노
글을 해산한 그녀는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었다며 해우한다. 아니 에르노의 책장 네 번째 칸에 있던 이 사건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지 감히 상상해 본다.
오늘도 노트를 꺼내 본다. 숨을 고르고 얼굴이 붉어지는 이야기를 읽는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참아보지만 흘러나오는 울음은 막을 길이 없다. 이 사건들의 한가운데 내가 있다. 구질한 골짜기에서 홀로 치열했던 나는 또 부끄러움을 몰래 쓴다.
202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