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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Feb 11. 2023

손에 쥔 것

쓰는근육 10

치렁거리는 아침이 있다. 오늘이 딱 그랬다. 며칠 전부터 체기가 가시질 않아 삼일 밤을 지새웠다는 아버지의 손을 따느라 하마터면 버스를 놓칠 뻔했다. 가늘게 내리는 비가 눈가를 어지럽혀 결국 장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생각해 보니 한 손에는 이미 회사에서 작업해야 할 것이 있어 챙겨 나온 맥북이 있었다. 평소 걱정과 근심을 인생의 업이라 여기며 사는 인간답게 가방은 늘 한 짐이지만 그래도 손은 가볍게 다니자는 것이 평생의 철학이었는데 말이다. 모든 것이 미해결인 상태로 셔터가 내려가는 문을 헐레벌떡 탈출한 사람처럼 시작하는 하루. 


손이 무거운 날엔 마음도 무겁다. 선택과 선택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손은 두 개이기에 한계가 있으며 그 개수에 맞춰 내려놓고, 버려야 하는 것들이 생긴다. 엄마는 사과를 먹을 때마다 내 어릴 적 이야기를 하며 혼자 웃는다. 과일을 유독 좋아하던 네 살 유진이는 사과를 깎아놓는 족족 허겁지겁 집어먹었다고 한다. 제 아무리 날랜 손이라도 어른들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웠던 네 살 유진이는 눈앞에서 한 개, 두 개씩 사라지는 사과 조각을 보며 불안했던 터였다. 이미 사과는 양손에 가득했지만 네 살 유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고모를 순서대로 쳐다보고는 사과를 쥐고 있던 한쪽 손의 손 등으로 접시 위 사과를 찜 했다는 이야기. 엄마는 그 장면을 바보스럽게 따라 하면서 매번 웃는다. 삼십몇 살의 유진이는 비록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웃어서 따라 웃는다. 사실 그 이야기가 나에겐 그리 유쾌하진 않다. 그토록 욕심이 많던 내게 손을 가볍게 하는 것은 매일 매 시간이 숙제니까. 


그런데 가끔은 나도 모르는 욕망의 우선순위를 손에 쥔 것을 통해 발견한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를 타고 회사 앞 정류장에 내렸다. 그 사이 한 시간여의 통근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넷플릭스까지 한 손에 추가됐다. 그 손을 마련하기 위해 맥북과 우산을 한 손에 쥐었다. 그런데 아차! 나도 모르게 버스에서 사이렌오더로 모닝커피를 시켰다는 것을 육교 반쯤 지났을 때 떠올랐다. 이미 음료는 나온 상태. 나는 남은 육교를 걸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우산과 맥북은 어찌할 수 없으니 드라마는 이따가 다시 보자. 하지만 커피숍 문을 열고 나와 막상 내가 포기한 것은 우산이었다. 드라마는 마지막화였고, 두 남녀 주인공은 밀고 당겨가며 절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남의 사랑싸움 앞에서 이까짓 비가 대수냐, 미스트라고 생각하지 뭐. 그때 나는 내 손에 들린 것들이 결국 내 욕구의 우선순위라는 것을 깨달았고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기원전 세계적인 땅부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의 '빈 손' 일화는 기원 후 20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린 그가 유언으로 자신의 손을 밖에 내놓고 묻어달라고 했던 그 일화 말이다. 무슨 그로테스크한 말인가 싶지만, 아무리 쥐고 또 쥐어도 결국 죽을 땐 아무것도 쥐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공수래공수거. 어차피 욕심을 내어봤자 그건 결국 내 손, 그 작은 바닥 안에서 일 뿐이다. 나란 아이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만큼 백 개의 손이 있더라도 결코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쥐지 않고 고양이처럼 물렁해지는 연습. 



202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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