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지 Aug 31. 2022

단골

쓰는근육 6


아픈 김에 쓴다. '단골'이야기지만 유감스럽게도 병원 이야기다. 30대가 되고 나서 회사 근처 단골 병원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단골 이비인후과, 단골 산부인과, 그리고 오늘부로 단골 내과까지. 증상에 따라 병원을 달리 가고 있자니 사실 단골을 고르는 기준을 딱히 정해본 적은 없지만 그나마 나 스스로 '신뢰'를 느끼는 포인트를 생각해보자면 '고수의 냄새'였던 듯 싶다.


사실 그동안 즐겨 찾는 가정의학과가 있었다. 여자 선생님에 깔끔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어 세 번 정도 다녔던 것 같다. 진료를 볼 때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너무 잘 들어주시는 나머지 내 병명은 오로지 내 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 조금 걸렸다. 이번에도 결국 가정의학과에서 지어온 약이 이틀이나 효과가 없어 '의원'이라 이름한 내과에 갔다. 각종 예방접종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빛바래고 철 지난 POP글씨로 쓰인, 도수치료로 유명한 대머리 의사 선생님의 인터뷰 영상이 무한 재생되는 그곳. 증상을 대충 듣더니 누워보라고 하고는 차가운 청진기로 한 번, 손으로 장기 이곳저곳을 꾹꾹 눌러본 후 내일 아침까지 굶으라는 반말 처방. 오랜만에 엉덩이 주사를 맞고 나와 약을 타러 가면서 생각했다. '그래, 앞으로 위장염이 생기면 여기로 와야지'. 그리고 또 생각했다.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20대 직장인 시절에는 분명 회사 근처 단골 맛집 지도를 만들던 나였다. 이 집이 백반집이어도 여기는 '미역국'이 맛있고 저 집은 일식집이지만 '점심 특선 순두부찌개'가 맛있다는, 그런 디테일함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맛이 있었다. 물론 그 때라고 백날 건강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음양오행으로 보나, MBTI로 보나 나는 '위장'이 약한 사람이기에 병은 체질이었다. 선천적 체질. 그렇지만 보통 3일 이상을 앓아본 적이 거의 없는데 30대가 되며 점차 아픈 나날이 많아졌다. 종종 음식은 생존을 위해 먹고 오히려 이 약은 급체 했을 때, 저 약은 역류성 식도염에... 혼자 중얼거리며 약을 분류하기 바빠졌다. 영양제도 회사에서 제일 많이 먹는 사람이 됐다. 회사에서 '죽겠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기도 한 나의 모순적인 모습이다. 매일 곡소리를 내지만 또 그렇게 죽어라고 병원을 찾는 나 스스로가 웃기다. 영화 <소공녀>에서 미소가 가장 먼저 찾아갔던 문영이 점심시간에 직접 포도당을 맞는 법을 익혔다는 것에 코웃음 치던 29살 나를 찾아가 때려주고 싶다. 


약을 받아보니 어제 가정의학과에서 지은 약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냥 참고 어제 약을 잘 먹었다면 무난히 나았을까? 역시 나는 의사가 아녔음을, 병에 대해 무진장 무지했음을 깨닫는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온다'며 대한민국의 심금을 울린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처럼, 병이 올 때는 병만 오는 것이 아니다. 약제비, 주사비, 종종 택시비, 음료대... 굳이 오지 않아도 무방한 지출까지 끌고 오는 것이다. 삶을 책임진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 쓴 맛을 알아버린 나의 삶에서도 베테랑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일단은 장염 다 나으면 장칼국수를 먹겠다는 계획만 꼭 달성해보겠다.



2022.8.31


이전 04화 젤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