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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Apr 14. 2022

젤리

쓰는근육 4



불안하면 씹는 버릇이 있다. 보통 예전엔 사람을 씹었다. 나의 불안을 남의 불행으로 채우던 때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씹는 행위'를 끊은 건 이십 대 중반쯤이었나. 그게 내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중단했다. 대단한 깨달음은 아녔다. 남의 치부를 파고 또 판다 해도 어차피 내 인생이 그 치부의 땅 위에 삐까뻔쩍한 건물을 올릴 만큼 행복하진 않다는 것을 체감한 후였으니까. 나름 뼈 아픈 경험이었다. 어느 TV쇼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장기하가 자작곡인 <별 일 없이 산다>를 짓게 된 배경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확신했다. 그래, 별 일 없이 사는 것만큼 남의 잣대를 이길 수 있는 건 없겠구나 (그의 최신곡인 <부럽지가 않아>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의 불안은 끊임없이 찾아오기 마련. 그때마다 젤리를 꺼내 씹어먹었다. 저작 운동을 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달고 맛있는 데다 귀엽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좋은 대체품은 없었다. 일을 하다 막히는 기분이 들면 용수철처럼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가 회사 앞 편의점에서 젤리를 사 왔다. 곰돌이, 포도, 지렁이, 계란 프라이, 콜라, 복숭아... 맛도 모양도 다채로운 젤리를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다 보면 어쩐지 모든 게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인지 흡연자가 많은 홍보회사에서 용케도 오래 버텼다.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불필요한 살이었다. 앉아서 하는 거라곤 턱 근육운동뿐이니 양심 없게 예상치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 젤리는 죄가 없다. 귀엽고, 달고, 맛있으니까. 그 귀여움에 속아 무장해제되어버린 내가 유죄지. 뱃가죽 아래 내장지방으로 축적되고 있을 끈적한 젤리를 생각해보니 내가 홀로 싸워온 부정적인 감정의 잔해들인 것 같아 괜히 배를 쓰다듬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로도 제작된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주인공 안은영은 비비탄 총과 요란한 컬러의 장난감 칼을 쥐고 젤리와 싸워 나간다.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지만 본인 눈에만 보이는 젤리들을 퇴치하는 사명이 직업보다 중요해 보일 정도. 남들이 볼 땐 괴짜 외곬로 보이지만 그녀는 괘념치 않는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에서 그녀는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 현실의 시선에 에너지를 쏟을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한 잡지 인터뷰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히어로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약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 이익을 내려놓는 사람,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만 받아도 계속해나가는 사람, 보편적인 것과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 세계에 친절한 사람이오."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며 이 구절을 씹어 삼켰다. 내 뱃속의 젤리 잔해를 거두어주는 지극히 평범하고 용감한 히어로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오늘도 젤리를 샀다. 반짝거리는 sour 파우더가 잔뜩 붙은 도마뱀 젤리를 가장 좋아한다. 오늘 하루를 견뎌낼 나의 무기. 잘 싸웠다 이야기할 수 있는 하루를 만들고 싶다. 




202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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