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근육 4
불안하면 씹는 버릇이 있다. 보통 예전엔 사람을 씹었다. 나의 불안을 남의 불행으로 채우던 때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씹는 행위'를 끊은 건 이십 대 중반쯤이었나. 그게 내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중단했다. 대단한 깨달음은 아녔다. 남의 치부를 파고 또 판다 해도 어차피 내 인생이 그 치부의 땅 위에 삐까뻔쩍한 건물을 올릴 만큼 행복하진 않다는 것을 체감한 후였으니까. 나름 뼈 아픈 경험이었다. 어느 TV쇼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장기하가 자작곡인 <별 일 없이 산다>를 짓게 된 배경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확신했다. 그래, 별 일 없이 사는 것만큼 남의 잣대를 이길 수 있는 건 없겠구나 (그의 최신곡인 <부럽지가 않아>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의 불안은 끊임없이 찾아오기 마련. 그때마다 젤리를 꺼내 씹어먹었다. 저작 운동을 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달고 맛있는 데다 귀엽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좋은 대체품은 없었다. 일을 하다 막히는 기분이 들면 용수철처럼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가 회사 앞 편의점에서 젤리를 사 왔다. 곰돌이, 포도, 지렁이, 계란 프라이, 콜라, 복숭아... 맛도 모양도 다채로운 젤리를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다 보면 어쩐지 모든 게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덕분인지 흡연자가 많은 홍보회사에서 용케도 오래 버텼다.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불필요한 살이었다. 앉아서 하는 거라곤 턱 근육운동뿐이니 양심 없게 예상치 못했다 말할 수 없었다. 젤리는 죄가 없다. 귀엽고, 달고, 맛있으니까. 그 귀여움에 속아 무장해제되어버린 내가 유죄지. 뱃가죽 아래 내장지방으로 축적되고 있을 끈적한 젤리를 생각해보니 내가 홀로 싸워온 부정적인 감정의 잔해들인 것 같아 괜히 배를 쓰다듬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로도 제작된 정세랑 작가의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주인공 안은영은 비비탄 총과 요란한 컬러의 장난감 칼을 쥐고 젤리와 싸워 나간다.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지만 본인 눈에만 보이는 젤리들을 퇴치하는 사명이 직업보다 중요해 보일 정도. 남들이 볼 땐 괴짜 외곬로 보이지만 그녀는 괘념치 않는다.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에서 그녀는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 현실의 시선에 에너지를 쏟을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한 잡지 인터뷰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히어로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며 이 구절을 씹어 삼켰다. 내 뱃속의 젤리 잔해를 거두어주는 지극히 평범하고 용감한 히어로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오늘도 젤리를 샀다. 반짝거리는 sour 파우더가 잔뜩 붙은 도마뱀 젤리를 가장 좋아한다. 오늘 하루를 견뎌낼 나의 무기. 잘 싸웠다 이야기할 수 있는 하루를 만들고 싶다.
202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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