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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겸 Mar 02. 2020

성폭력에 맞서다

여성주의 인식론과 반성폭력 운동

* 이 글은 한국성폭력 상담소에서 기획한 책 <성폭력에 맞서다>의 '제2부 반성폭력 운동 담론을 말한다' - '제6강 여성주의 인식론과 반성폭력 운동'의 내용 중 여성주의 인식론의 전제와 주장을 일부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1. 완전한 중립적 입장은 없다

 여성주의 인식론은 [피해 당사자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을 통해 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을 보면 열두 명의 배심원이 소년이 '유죄가 아니다'라고 판단할 수 있었던 것은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하고 '경험자'의 말을 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합리성, 객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실함, 용기, 타인에 대한 이해, 편견을 제거하고 경험을 존중하기 등을 통해 밝혀진다. p211 (물론 영화 속 편견의 제거가 우연에 의해 이뤄졌으며 백인 중산층 남성으로만 이뤄진 배심원이었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한국은 판단자의 입장에서 진실을 구성한다. 흔히 한국 법정에서는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 피해자의 성과 관련된 경험, 과거를 캐묻는 상황이 자주 보인다. 법정에서 가장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판사, 검사, 변호사다. 진실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관성이나 경험을 배제하는 형식적 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해 여성과 관련된 상담소, 단체는 피해자 '편'이 된다. 즉, 이들의 말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생활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또한 법정에서 당사자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객관적이라고 만들어놓은 위계, 위치에 있을 뿐이지 자신들도 각자 편견을 갖고 법정에 서게 된다. 그래서 완전한 중립적 입장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객관성을 부여는 과정에서 우리는 발화의 주체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p214


2. 상황적이고 부분적인 지식

 여성주의 인식론은 객관성이란 중립적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합리적 지식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크게 여성주의 인식론은 경험론과 입장론으로 나뉜다.


    * 경험론 :

차별받고 억압된 집단에 대한 지식을 더 잘 생산할 수 있는 위치는 당사자에게 있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편견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들의 경험을 합리적 진실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 입장론 : 

피해 당사자의 말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당사자여서가 아니다. 특정 집단이 그러한 피해, 차별을 받는 것에 사회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차별, 폭력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생산과 분배의 정치경제학이 정의롭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험론, 입장론을 성폭력 문제에 대입시켜보면 이런 이분법이 만들어진다. '모든 여성은 (잠재적으로든 실제로든) 성폭력 피해를 입으며, 모든 남성은 (잠재적으로든 실제로든) 성폭력 가해자'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사회가 변화할 수 없다. 여성들 간의 차이는 사라져 버리고, '피해자로서의 여성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여성'만이 성폭력에 저항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욕망하는 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이 이런 피해-가해를 둘러싼 이분법적 성별 권력관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p215

 '모든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다'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피해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안다'는 것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경합적이며 상황적인 맥락에서 이뤄지며, 변화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p216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남성의 타자로서 정의 내려진 이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용할 때의 위험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규칙과 문법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경험을 부정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그 정보가 지식이 되는 과정과 [협상]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p217 대개 남자는 여자가 문제를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심각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p219 하지만 각 과정과 문제는 배제되어 사 소화되었을 뿐이지, 현실적으로 응축된 상징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상황적이고 부분적인 지식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정체성의 재구성을 위한 문제제기와 질문에 대해 존중할 필요가 있다. 


3. '안다고 가정된 개인'의 해체와 새로운 주체의 위치

1/ 여성주의 인식론은 추상적 보편성, 객관성을 비판하며, 근대가 만든 '안다고 가정된 개인'을 해체하고 새로운 주체의 위치를 제안한다.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 필요에 시간을 투자하기 힘들 정도로 여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주변인, 경계에 존재하는 자(=아주 구체적인 이해관계로 연결된 자가 아닌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추상적 보편성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이야말로 예외적인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p220

 기존의 편견에 물들지 않은 더 강한 객관성은 주변인의 위치에서 확보될 수 있다. 이에 도나 해러웨이는 '겸손한 목격자'라는 주체의 위치를 제안한다. 겸손한 목격자는 어떤 동일성에도 포획되지 않으며 경계에 있는 혼종적 존재, 곧 메스티자(mestiza)다. 특수한 이해관계에 귀속되지 않고,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 기존의 권위 있는 서사에 기대지 않은 채 현실을 보고 읽는 사람이다. 이는 경험 자체에 빠지다 보면 경험 외부를 볼 수 없음을 경계한다. 이처럼 여성의 경험, 언어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읽고 쓰기 방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 새로운 주체의 위치를 설정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지식을 권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어떤 경험이 지식이 되는가, 이 지식을 언제 사용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지식의 사용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는 정치적 문제이자 국가-개인(남성)-개인(여성) 사이의 통치 질서에 대한 문제다. 

 현재 한국에서는 여성의 경험은 '몸'과 관련된다. 경험했다는 것 자체에 너무 많은 의미가 담기면서 권력이나 지식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경험이 놓인 위치는 사라져 버리고, 경험 여부 (예 : 성 경험)만 남게 된다. 하지만 각자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성폭력 경험은 똑같은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주체의 위치가 중요한 것이다. p222 

 이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도나 해러웨이는 [회절(diffraction)] 개념을 통해 동일성이 아닌 차이를 인식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회절은 좁은 틈을 통과한 빛이 분산되면서 만들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반사와 달리 똑같은 상을 만들지 않고 차이를 만드는 개념이다. 이것이 가능해져야 더럽혀진 여성이라는 재현에 도전할 수 있게 되고, 폭력 자체를 비판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지식을 어떻게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느냐의 문제는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우리'로 통합될 수 있는지를 둘러싼 투쟁이며, 기존의 남성 중심적으로 통합된 '우리'를 다시 해체하고 주체의 위치를 재배치하는 싸움이다.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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