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분의 진료시간을 위해 광주에서 부산까지 길에서 쏟은 많은 시간 끝에, 얻은 거라곤 #이식실패 후 난자 0 비어있는 냉동고였다. 그리고 숫자가 긴 카드 명세서. 1차 #시험관시술 이후 기력도, 마음도, 지갑도 텅 비어있었다. "원래, 1차 이식으로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위로하는 의료진의 한 마디보다 난자 4개 채취 중, 미성숙 난자 1개. 냉동 0. 이식 실패 0.1의 숫자들과 몇 백만 원을 넘어서는 숫자들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이식 실패 후 2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카드대금은 할부로 나타나 실패를 환기시켜줬다. 카드 결제일 때마다 나는 얇은 지갑과 남편의 눈치 사이를 오갔다. 꽉 차 있던 건 내 머릿속 분노와 연민의 감정뿐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의미 없는 이 한 마디만이 지속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유 있는 눈물만 송골송골 맺혔다. 그렇게 몇 날을 보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뚝뚝 떨어지는 #난소기능수치였지만 시험관 시술만큼이나 중요한 건 ‘쉼’이었는데... 그냥 쉬는 게 아니라 잘 쉬는 것. 이불속에서 몸은 누워있으면서도 정작 힘들 내 마음 하나, 누이지 못했던 것이다.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다잡지 못해 심난해하다, 머릿속 생각이 두바이에까지 미쳤다. 멀리도 갔다.
스무 살의 끝자락의 나는 한국에서 비행기로만 13시간 거리, #두바이 라는 도시에서 근무 중이었다. 지금 돌아보건대 내 인생 가장 빛이 났을 나이, 20대 후반이었다. 그럼에도 세계에서 단연 블링블링한 도시, 파릇파릇한 젊음의 정점에서도 난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고단한 회사 스케줄에 찌들어있었으며 시시때때로 한국에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sns 속 사진들로 그리워했다. 결혼을 했다는 누군가의 소식에 부러워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차곡차곡 모여가는 적금통장 속 잔액에 불안해했다. 끊임없이 비교 중이었고 지금의 나를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
얼굴에 수심 가득,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내게 인도인 버스기사 아나르가 물었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인도에 세 살 배기 딸이 있던 무성한 수염 속 옛된 얼굴의 기러기 아빠였다. “욜, 무슨 일 있었어?” 인도인들 특유의 된소리 발음에서부터 살짝 웃음이 나던 차였지만 나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 하소연을 시작했다. 업무의 고단함, 동료와의 갈등, 빠듯한 스케줄, 향수병... 넋두리 즈음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아나르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하며 말했다. “욜, 회사에서 나오면 회사 폴더는 그냥 닫으면 돼. 그리고 푹 쉬는 거지. 회사 폴더는 일하러 왔을 때만 다시 열고, 그때 생각해. 가족들이 그립겠지만 여기선 지금 이대로를 즐겨봐. 나중에 한국에 돌아갔을 때 두바이를 아쉬워하지 않도록 말이야.” 별 말 아니었는데, 아나르 외모에서 풍기던 바보스러움 치곤 꽤 그럴듯한 조언이어서 나는 그때 조금 놀랐었다. ‘폴더에 비유라니.’ 기대 이상의 멘트였다. 그리고 나는 그 예상 밖의 조언에 위로받았다. 그는 벌어진 앞니를 환하게 드러내며 해맑게 웃었다. 그 이후로 괴로운 일이 생길 때, 인생의 비스킷 통과 같아서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는 말처럼 난 시시때때로 아나르의 ‘폴더 닫는 연습’을 상기시켰다. 아나르 말대로 폴더를 닫으면 될 일이었다. 지금은 #난임 폴더를 닫을 때였다. 그리고 지친 내 마음에 다른 꽃을 틔우기 위한 물을 줄 시간. 적당한 볕 아래 마음을 누일 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임이라는 단어는 당분간 털어내는 것으로 했다. 잡념들로 머릿속이 바쁠수록 몸은 더 바빠야 한다. 냉장고를 열어봤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담고 있는지 몰랐다. 아니, 실은 문을 열 때마다 죄책감이 실린 눈길을 잠시 주긴 했었다. 결국 양가 부모님들께 받았던 밑반찬들과 먹다 남은 요리들을 덜어냈다.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인 요즘, 비우기가 미덕이라지만 어쩐지 이 작업엔 늘 죄책감과 후련함이 동시에 따랐다. 그리고 ‘없다 없다’ 했던 보관용기들과 ‘이런 게 언제 있었나’ 싶은 묵은 식재료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놀라운 발견들이 계속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담고 있던 냉장고 앞에서, 쿰쿰한 냄새들 속에서, 시험관 시술 실패라는 단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냉장고 청소를 할 때마다 묵혀진 것들을 버리는 쾌감이 배가 되고 머릿속 잡념들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짐을 느꼈다. 간만에 냉장고 속이 환해졌다. 내 머릿속도 텅 비워졌다.
그리고 나를 위한 요리, 든든한 한 끼로 몸 뿐만 아니라 마음을 채우기로 했다. 음식이 주는 위안의 힘을 알기에, 요리를 하는 날이 잦아졌다. 어느 날은 지친 나를 위한 요리, 남편의 원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요리, 가끔은 내가 엄마에게, 아빠에게 대접하는 요리. 요리를 하는 동안 난 위로받고 있었다.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나 단단하고 달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의 대사처럼 난 지금 겨울을 겪어내는 중이었다. 요리 후엔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함께 먹으며 그 안온함 속에 담담한 위로를 받았다. 자주, 함께 할 일이었다. 요리하는 일, 그리고 함께 나누는 일. 2-3개월간, 마음 뿐만 아니라 자궁도 쉬어간다는 생각으로 많이 보고, 많이 먹고 많이 돌아다녔다. 몸은 늘 맴도는 일상의 바운더리 안에서 있었지만 그 안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많은 영화 속을 거닐었다.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는 ‘사람은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살고 있다.’라는 대사로 시작된다. 영화를 보며 ‘곧 만나겠거니, 걸음이 느린 아이를 좀 늦게 만나는 것일 뿐’ 다독거려줬다. ‘기적은 일어나기 때문에 기적이라 하죠.’로 끝나는 마지막 대사에도 위로받았다. 내 지금의 고민들도, 문득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올 거라며. 긍정의 레시피였다. 겨울의 제주에 들러, 새별 오름에도 올랐다. ‘초저녁에 외롭게 떠있는 샛별 같다’해서 ‘새별’이라는 예쁜 이름이 붙은 오름이었다. 그곳에서 억새들을 차분히 눈에 담고 왔다. 하늘하늘거리던 억새들은 차갑게 부는 바람에 그저 내맡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 스스로 초저녁에 홀로 떠있는 샛별처럼 외로웠지만 모두가 나에게 ‘쉬어가도 괜찮아’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바람에 흔들려보라 말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조급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초조함이 내 영혼을 갉아먹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었다.
또, 난임으로 인해 우울한 기운으로 채워진 일상이어도 기록하기로 했다. 기록하지 않으니 자꾸 잊어버리고 사진을 찍지 않으니 일상이 특별한 것 같지 않아서였다. 난임 일상도 여행자의 마음으로 기록하고, 사랑하기로 했다. 달달한 날보다 쌉싸름한 날이 더 많은 난임 일상일지라도 그 조각조각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역사가 될 것이므로. 쌉싸름한 날의 기록이, 위로가 되고 자양분이 되는 날도 있을 것이므로. 하여, 달콤 쌉싸름한 기록을 시작하기로 했다. 블로그를 시작했다. 내 블로그가 새삼 좋아진 건, 달콤 일상을 기록한 폴더 속의 글이 쌉싸름 폴더에서의 글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고 난임 폴더에서의 난, 많이 힘들어하지만 그 폴더를 나와 '꺼내먹어요'로 가면 어느새 맛집 지도 안에서 금방 맛있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 열어지는 슬픔 폴더는 클릭 한 번으로, 이내 닫아버리는 연습을 했다. 아나르의 말처럼. 달콤, 맛있는 일상을 채워나가는 연습. 소소함 가운데 달달함을 찾으려는 노력. 하루하루 난임으로 지친 나를 위로하는 법이었다. 하루가 뿌듯했을 뿐인데, 참 재수가 좋았다고 두목에게 고백하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하루에, 뿌듯한 한 조각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며 난 매일을 블로그에 고백했다. 뾰족뾰족 날이 서있는 어느 시기엔, 잠시 멀어져도 좋다. 사람들로부터 거리두기. 내 마음은 들여다보기. 그리고 달콤함도, 쌉싸름함도 인정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도 않는 아이를 갖으려다가 내 일상, 그리고 내 성격이 망가지는 것이 아닐까.' 꽤 자주,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들어왔다. 그때마다 의식적으로 집중을 분산시켰다. 뾰족한 나를 피해, 난임 일상 속에서도 마음을 위로하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