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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May 01. 2024

병어조림과 샐러드 사이

불효녀 K 장녀의 요리

수산물 공판장에 갔더니, 해양수산부 지원 온누리 상품권 환급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지난번에도 병어조림과 꽃게탕, 갑오징어 미나리 무침을 맛있게 먹고도 2만 원 상품권을 환급받았는데...! 이번에도 행사 중이라니! 병어와 고등어, 바지락을 사 왔다.


아빠의 잃은 미각은, 지난번에 먹었던 포근포근한 감자맛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병어조림을 기억하는 대신 국물 속 감자만 끄집어내 간신히 이야기하셨다.



비타민 B군과 8대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해 원기회복과 면역력 강화에 좋다는 병어. 나에게 병어조림하면 역시나 술 한잔 생각나게 하는 맛드러 진 술안주인데... 아빠의 잃었던 입맛을 오래간만에 되살렸다니 반가울 일이었다.


뽀얀 살뜨물에, 성큰성큰 반달무와 감자를 넣고 준비해 둔 양념을 끓였다.


간장 5T / 고춧가루 4T / 설탕 3T
굴소스 2T / 식초 1T / 된장 한 스푼
다진 마늘 1T / 다진 생강 0.5T
굵은소금 0.3T / 후추 10바퀴 / 미림 5스푼

양념이 잘 베이도록 칼집을 크게 넣은 병어 다섯 마리에, 간간히 양념 국물을 끼얹어주며 보글보글.


아빠는 병어 흰 속살을 숟가락 한가득 담고 양념장 국물을 끼얹어 한 입 가득 드셨다. 밥 한 술 뜨지 않은 채로, 병어조림을 먹고 바로 젓갈로 가는 젓가락 동선.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지는 순간이다.


나트륨 섭취를 줄이기 위해 찌개와 조림 등 음식을 줄이고 저염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아빠는 거의 10년째 폐암에서 뇌종양으로 이어지는, 암 투병 중이다. 그러다 최근 '뇌수막 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빠의 식성은 내 눈에 나트륨 폭탄이었다. 비단 병어조림이 아니더라도, 메기탕, 젓갈, 추어탕 등 찌개와 탕, 조림 사이를 오가다 간간히 젓갈을 찍고서 돌고 도는 입맛이라니. 하지만 그 외의 메뉴에선 좀처럼 입을 벌리지 않으니 먹고 싶은 거라도 드시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잔소리들을 꾹꾹 눌러 담고 눈을 질끈 감는다. 투병 중인 아빠의 근 10년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일하랴, 빈번하고도 길고 긴 회식을 하랴... 평생을 밖에서 돌고 돈 아빠의 십수 년이 원망스러웠다. 빈틈이 많아 물지 못한 손으로, 내 몸 하나, 쌍둥이들 둘, 까다로운 남편까지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혼자서 K 장녀 노릇을 하려니 때때로 부아가 치밀었다. 가끔 이유도 없이 눈물이 새어들었다.


친정집에서 병어조림 먹는 아빠를 보다 말고, 거칠게 설거지를 하고선 우리집으로 돌아가 우리 식구들을 위한 밥상을 한번 더 차린다.



아침엔 해독주스나 아보카도와 바나나를 간 주스를 마신다. 샐러드드레싱 외에 양념이라곤 없이 최소한의 조리법으로만 채워 하루 한 끼, 두 끼를 먹기 시작한 게 몇 달째다.


흰쌀밥 대신 귀리, 수수, 기장, 보리 등 여러 잡곡을 넣어 밥을 짓는다. 간을 심심하게 해, 제철 재료로 요리를 한다. 쌍둥이들에게 소시지란, 소풍날 선물처럼 특별한 날에나 받는 소시지 문어 한 마리가 되었다.


친정집과 우리 집을 오가며, 한 끼니 ; 두 밥상을 차리며

정작 식단 조절을 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구시렁대다가..


최근 어느 의사에게 들었던 '호스피스 병동' 단어를 떠올리며 눈물을 후둑거렸다.


의사 선생님은, MRI검사지 기록 하나 판독할 뿐이면서...! 심드렁하게 '호스피스' 단어만 두 번이나 나열했다면서 툴툴거리며 나왔던 병원이었다.


최근 악화된 병세로, 막연하게 품고 있생각전문가의 말로 듣고 나니 그동안 묵혀왔던 온갖 감정들이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오는 듯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남은 단어 중에 '희망'이라는 글자는 없었다.

입맛에 당기는 거라도 잡솨야지...

세계보건기구(WTO)에서 권장하는 일일 섭취 나트륨 함량이고 뭐고, 아빠는 뭐라도 먹어야 했다. 아빠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날들은 앞으로 몇 날이나 될까. '호스티스 병동 세팅'이라는 단어는 몇 날, 몇 달을 암시하는 걸까.


그래서인지 아빠의 입맛은 하루하루 까다로웠다.. 어느 날은 세세하게 떡의 세계를 파고들었다. 어느 날은 암뽕 순대를 이야기했다가, 갑자기 시장 맛집 녹차 호떡으로 종목이 바뀌었다.


나는 내 밥상은 건강한 샐러드 식단으로 푸릇푸릇하게 채워 넣다 제철 밥상으로 원기를 북돋았다가... 이내 아빠에게로 건너가, 널을 뛰는 아빠 입맛에 그때그때 맞추는 밥상을 차렸다.


나 혼자서만 건강하게 살아보겠다고 비겁해졌다가, 나는 말년에 저렇게 아프지는 않을 거라고, 이를 앙당 물었다가... 내 감정 역시 널을 뛰었다.


날로 메말라가는, 아빠의 힘겨운 목 넘김 뒤로, 연신 오물오물거리는 8세 쌍둥이들의 작은 입들이 보인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 나는 어느 포인트에, 멎어있어야 할까. 내 손의 숟가락은 잠시 고민한다. 제철 주꾸미는 봄의 진미, 보양식이라 한다. 산란기 알이 꽉 들어찬 흰 쌀 밥 같은 주꾸미 알들을 누구의 입으로 먼저 넣어줄 것인가.


우리가 아기로 삶을 시작할 때는 누군가 우릴 돌봐 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 그리고 나처럼 아파서 삶이 끝나 갈 무렵에도 누군가 돌봐 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 그렇지 않은가?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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