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여희 May 13. 2024

타이머와 방해금지를 쓰는 시간

디지털 디톡스를 연습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간 아이들에게 '엉덩이 붙이는 연습'을 습관을 길러준답시며, 타이머를 구입했다. 20분, 40분 단위로 타이머를 맞춰놓고 온전히 한 가지 활동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거다. 보통 타이머는 사고력 수학이나 연산 수학 공부, 한글 쓰기를 하는 시간에 적용된다. 레고 만들기, 요리 활동, 미술 시간, 인형, 모래 놀이하는 시간은 타이머를 굳이 쓰지 않아도 잘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타이머 눈금을 세팅하기 전에 늘 "우리, 시간 모으자~" 말한다. 엄마가 가기 싫어하는 놀이터에 가는 시간, 엄마가 잘 모르는 바둑 대적을 해주는 시간, 엄마에겐 재미없는 보드 게임을 함께 하는 시간. 그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서는 너희도 '공부'를 하는 '시간'을 모아야 공평하지 않겠니, 이런 논리에서였다.


군말 없이 응당 '공부' 시간을 모아야 '놀이' 시간이 생기는 걸로 인지하던 쌍둥이는, 서로 '타이머 반장'을 하겠다며 순번을 기다렸다. 그리고 20분 텀, 또는 40분 텀으로, 함께 테이블에 앉아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엉덩이를 들썩들썩, 발을 까딱까딱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시간엔, 모름지기 공부란 패드가 아니라 연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책이나 지면으로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냐, MZ세대가 아닌 엄마의 논리가 적용된다. 그런데 지면 학습지를 풀거나 종이책으로 공부를 하던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아이들에게서 핸드폰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엄마에게 '불공평하지 않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엄마, 핸드폰으로 브런치 글 쓰는 거야...' 말했지만 어쨌든 고객센터에 불만 사항은 접수됐다. 하여, 나도 어쩔 수 없이 종이 신문이라도 떠들어보고, 종이책을 읽으며 연필을 사각거린다.


그런데, 20분, 40분 설정된 타이머의 빨간색이 닳아지는 시간은 왜 이토록 긴 건지.

스마트폰의 터치가 아닌 연필로 쓰는 손글씨는 왜 이토록 어색한 건지.

한 권의 책을 진득하게 앉아서 긴 호흡으로 읽는 일이란, 왜 이토록 공력이 드는 건지.


알고리즘에 맞춰 내가 원하는 류의 기사로 들만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기사를 클릭하고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다른 곳에 눈과 손이 가는 참을성 앞에.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동안에도 화장실 청소를 겸하는 주부이자 육아맘 멀티 플레이어의 조급증 앞에.


천천히 눈에 담고 곱씹으며 읽는 한 권의 책 대신, 인스타그램에서 영상과 큰 글씨로 던져주는 릴스만 받아보던 게으름 앞에.


정작 굳이 타이머를 세팅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야 할 사람. 방해금지 버튼을 눌러놓고서라도 SNS와 사사로운 인간관계 소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사람은 8세 어린이들이 아니고 바로 나였다.


책을 읽다 말고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나 TO DO LIST 기록을 하고 있는 내 머릿속도 타이머를 설정해야 할 일이었다. 요가에서 명상으로 몸의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걱정과 생각도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내 머릿 속도 온전히 한 가지 이슈에만 몰입해야 하는 또 다른 의미의 명상이 필요했다.


사고력 수학 문제를 풀다 말고 문제집 한 켠에 올망졸망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에게, 공부할 때는 공부만 해야지! 다그칠 게 아니라.


내 밥 편하게 먹자고, 식당에서 으레 패드 영상을 틀어주며 입 안에 밥을 밀어 넣어줄게 아니라. 그래서 눈으로는 보고, 입으로는 오물오물거리기만 하여라 습관을 들일 게 아니라.


아이들과 타이머를 설정하며, 나 또한 정보의 홍수로부터, 소통 과잉으로부터 벗어난다.

머릿속에 켜져 있는 여러 생각 창들을 로그아웃한다.


이전 27화 병어조림과 샐러드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