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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Apr 19. 2024

대나무 숲에 쏟아내는 시간

내 일상 속에 요양보호사와 간병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런데 그건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그리고 더 한 스트레스일 거라, 아무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그럼에도, 한숨으로, 푸념으로 새어나가는 얄팍한 인성이다.

괜찮다, 이 터널을 우리는 무사히 잘 통과해 나갈 거다... 인스타 릴스에서마저 온갖 긍정의 말들과 영상들을 끌어당겨 불안한 마음을 달랜다.


​햇볕이 좋은 날에, 온 가족이 '여행'이라는 것으로 함께 하고 다섯 아이들이 뛰노는 가운데, 그 까르르 소리에 둘러싸여 있던 일상은, 한동안 없었다. 그 사진 한 컷이 오래된 추억처럼 박제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나에겐 1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10년이었을, 또 지옥이었을 시간들이다. 함부로 입 밖에 열지 않고, 쓰지도 않았다.

나의 보잘것없는 힘듦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드러내놓고 사막 기후의 햇볕에서 견디는 고통일 거라

내 입에 새어 나오는 알량한 한숨마저 염치없다 여겼다.


​우리 모두, 긴긴 터널의 끝을 기다리며 눈은 가린 채 최소한의 빛으로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간다. 그중 한 이는 좀 더 많은 빛을 볼 수 있어 길을 읽어내고, 다른 이는 좀 더 빨리 걸을 수 있어 더 먼 길을 미리 걷는다.


​그 와중에 공기 안에 유해한 바이러스들이 떠돈다. 걱정을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뒤에서 안도하는 가식은 양반이다. 잘 나갈 때 보이던 그 호의들 대신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조롱하듯 내뱉는 비아냥 어린 한 마디. 다른 이의 고통 따위 방해 요소로만 치부한 채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는 데만 급급한 잔인한 이기주의가 때때로 비친다.


​한 켠에서는 막막한 영화 장르만 오가는 가운데, 한 편에서는 '난생처음 학부형 2개월 차' 현실 드라마를 찍고 있다. 8세가 되어 초등학교 문턱을 넘어서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을 찾아 요 근래에만 2차례. 한 컷에, 봄볕에서 30분 넘게 온 동네를 뛰어다니는 역할이다. 그 와중에 요양보호사와 간병인을 찾고 거르고 깨알같이 떡 방앗간과 공판장을 찾는.


영화 '버드 박스'에서처럼 눈을 싸매고 한껏 긴장하며 더듬더듬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눈 풀어헤치고 정신없이 아이를 찾아 헤매던 영화 '나를 찾아줘'로 장르를 변경한다. 그러다 현실 드라마 억척 주부로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와중에 멀리서 보면 또 한껏 희극인지라 SNS 속 사진 몇 장만으로 팔자 좋은 한량 배우가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한정된 시간에 몇 컷을 찍어내는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시작된 감기를 시작으로 몸은 항문에서부터 생식기, 귀 포진까지 불편감을 말하고 있다. 건강 염려증은 전보다 더 도져, 불면증까지 들이닥치지 않도록 애쓴 게 어제, 그제 며칠이다.


대나무 숲에 힘듦을 토로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같이 겪지 않고도 손사래 칠 만한 강 건너 불일 수 있다. 하여, 그저 하루하루 감내하며 터널의 끝을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한 줄기 빛만을 꿈꾸며 간신히 걷는 걸음에도 사소한 요구들은 쏟아진다. 나는 곶감, 나는 칙촉. 누구는 주는데, 왜 나는 안 주냐 실랑이부터 누구는 챙기고 누구는 안 챙기냐 원망부터. 이건하고 저건 안 하냐. 탓부터 소소히 쏟아지는 비언어적 표현들까지. 무턱대고 던지는 응원은 바라지도 않는다. 대신해서 눈 싸매고 걸어달라, 대신 식량이라도 가져다 달라 요구하지 않는다. 무심코 쏟아내는 추임새들로 혼자 걷는 이 길의 기를 꺾지만 않길 바랄 뿐이다.


이런저런 것들로 인해서 오늘 잠은 글렀다. 다시 뒤척여야 할 몇 시간을 앞두고 답답한 마음을 대나무 숲에 쏟아낸다.

누군가에게도 못 꺼낼 마음을 글로 쏟아내고, 누구도 마음 편하게 사주지 않는 밥 한 끼를 사주고, 결혼한 뒤로 나를 위해 온전히 마음에 드는 가방 하나, 팔찌, 귀걸이 금붙이 하나 사들지 못한 못난 나에게 소소한 대리 만족이라도 주니. 이보다 유용한 대나무 숲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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