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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공부합니다.

정신 건강 의학과 상담보다 미술 심리 공부

난임기간 동안 아이가 생기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원더우먼 엄마의 열정은 어디로 갔나. 너와 나의 연결고리, 아이들로 인해 환상의 궁합을 자랑할 것 같았던 부부의 세계는 왜 이렇게도 살벌해졌나. 출산과 육아 굴레 속 시댁과 친정을 오가협소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어떻게 이렇게도 잡음이 끊이질 않는가. 모든 게 예상을 벗어나 두서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깊이 잠자지 못해 퀭한 눈을 멍하게 뜬 채로, 표정 없던 내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연신 새어 나오는 때가 빈번했다.



건강의학과 상담 진료, 어렵사리 예약한 끝에 두어 차례 가봤다. 투덜거리며 문을 닫고 나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일 테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은, 내게 의미 없이 비쌌다. 심리적으로 문턱이 높아 어렵게 들어간 자리였건만 아무런 소득 없이 쉽게 나 꼴이었다.


일단, 인터넷에서 떠도는 심리검사보다 더 형식적이던 수십 개의 질문지들을 마주했다. 가물가물하지만, 개별 상담과는 별개로 스트레스 지수 체크를 위한 검사지로 기억한다.


무미건조한 말투의 의사 선생님은 내게,

"이곳에 왜 오셨죠?"

라는 질문으로 내 근황에 대한 멍석을 깔아주셨다. 시작부터 반감 들게 하던 멍석이라,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지는 대답은 우물주물이었다. 그리고 나 혼자만 뱉어내던 근황 토크 중간, 간간히 곁들여지던 의사 선생님의 형식적인 추임새가 멋쩍어 서둘러 매듭지었다.

본인이, 본인의 스트레스에 대해
아주 잘 아시고 있는 듯한데요.

심리검사 결과, 스트레스 지수는 그다지 높지  다했다. "힘드시겠네요." 말 한마디가 있었다. 그리고 수면제와 신경 안정제 몇 알이 남았다.


크게 공감받았다, 대안을 얻고 왔다... 이렇다 할 명쾌함 대신, 이제 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일은 없을 거라는 다짐만 확고하게 안고 왔다.


눈물로 얼룩져, 퉁퉁 부은 얼굴로 찾았던 당시 내 마음은, 내가 아는 스트레스였던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혼자 후루룩 먹는 국밥집, 국밥 한 그릇.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마시는 카페라테 한 잔에 휘낭시에 한 조각이면 가라앉힐 수 있을, 그런 흔한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사실, 결혼 후 울화통이 터지도록 날 억울하게 만들고 심경 복잡하게 만들었던 건 몇몇의 손에 꼽는 원인로 귀결되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살뜰히 상담해 주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자며, 날 괴롭게 만들었던 것들의 원인을 분석해 봤다. 상황을 이해하려 애써봤다. 하지만 파고들면 들수록, 되뇌면 되뇔수록 피폐 해지는 건 나뿐이었다.



마음을 다스리고자 심리학 서적을 읽다 보면, 되레 화가 치밀었다. 왜 타인을,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늘 나로부터 시작되는 건가 싶었다. 날 괴롭게 만드는 상황들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해도, 이미 결론지어진 상태일 때가 많았다. 이는 사회에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무력감을 경험케 했다.


그러던 와중, 경력단절 신세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볼 심산으로 미술 심리 수업 자격증 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무료인 데다 수업을 다 듣고 나면, 자격증까지 준다는 말에, 내가 거주하는 지역구 밖으로 벗어나 이루어지는 수업에 타 지역민이 외로이 등록했다.


수업이 있는 날엔 고속도로 요금을 내가며 30여분을 내달려간다. 단 5분이라도 지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부쩍 아이들까지 채근해 가며 부산스럽게 군다. 


후줄근한 육아 일상의 작업복은 벗어던진다. 눈가에 멋쩍게, 아이섀도를 찍어 바르고 수줍게 립글로스를 반짝거린다. 서둘러 아이들을 보내고 나가는 매주 화요일의 일정. 텀블러에, 카페 라테 한 잔을 담아 홀짝거리며 빌보트 차트 TOP 100 노래들을 듣고 흥얼거리며 나가는 자리.


자주 참을 수 없게 된 이 모든 황량함 속에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통해 나만의 탈출구를 찾았습니다. 드로잉과 페인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객관적인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
1917년 펠릭스 브라운에게 보내는 편지>


미술치료나 미술심리재활의 목표는

내담자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집중하게 하여 자신을 바라보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다 한다.


아직은 나 스스로가 내담자가 되는 역할이라 미술활동을 통해 다름 아닌 나를 들여다보는데... 이토록 심플한 미술활동에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몰랐던 내면을 들춰볼 수 있다는 것. 숨겨왔던 정서 상태들여다본다는 것이 신통방통할 일이었다.


같은 디렉션으로 주어지는 활동일지라도 수업을 듣는 모든 수강생들의 결과물이 다르다는 것도 놀라웠다.


저마다의 자녀들을 낳고 나이 사오십을 바라보는 연령대의 사람들이면서도 이 간단한 그림 속에 상처받은 아이 하나를 숨기고 산다는 것을 들켰다.


주 양육자와의 관계 경험을 현재의 육아에 투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서로의 그림들을 관찰하고 파악하면서 나를 알아차리고 타인을 공감했다. 그 가운데 기분이완되면서 감정적 스트레스 완화되었다.

분이 내키면 수업 후에 커피를 한 잔 더 하고, 맛있는 밥을 함께 먹었다. 날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치유받고 있었다. 서로에게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공감력으로 응원을 아끼지 않는 상담자가 되어주었다.


정신건강의학과 대신 화요일의 미술심리수업. 내가 나를 찾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3시간의 일탈. 귀한 시간이다. 앞으로도, 당분간 쭉 그럴 테다.


자신의 어둠을 아는 것이
타인의 어둠에 대처하게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카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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