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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Jul 05. 2024

부부의 취향

#부부의다른체질


결혼한 지 9년 차를 넘어서니 집안 곳곳의 가전, 가구들도 저마다 연식 자랑 중이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나의 기초 체온과 에어컨 없이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다는 높은 기초 체온의 남편은 체감 온도는 현저히 달라서... 남편은 올해 첫 에어컨을 틀지 마자 예전과 다른 성능을 체감해 냈다. 냉매 가스라는, 내 귀엔 꽤나 전문적인 단어까지 언급하면서 A/S센터 서비스 오더를 내렸다. 내겐 냉매 가스의 개념보다, 단지 '에어컨 바람이 영 시원치 않다? 사실 그 바람이, 그 바람이다...'로 인식되는 현 상태였다. 기계적으로 서비스 신청을 했다.


단지 한층 청아해진 바람결만을 원했을 뿐인데... 별생각 없이 신청한 서비스는 복잡 다난했다. A/S를 위한 첫 번째 걸음은, 에어컨 실외기가 설치된 곳으로의 이동이었다. 하지만 덩치가 큰 부품가방을 들고서 실외기실로 이동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드레스룸에서부터 위기에 봉착했다.



#남편의취향


드레스룸은 사람 몸 하나 겨우 오고 갈만한 최소한의 공간만 허락한 채 빼곡히 들어차있었던 게다. 9년 전, 지어진 84 제곱 아파트의 드레스룸이 드넓을 일도 없었지만, 빼곡히 들어찬 남편의 옷들로 드레스룸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좁은 드레스룸 둘레로 구획된 옷장 공간을 넘어서... 룸 가운데에도 행거가 2단의 높이로 들어차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늘 옷이나 패션 등에 관심이 많은 남편의 취향에 불만이 많았다. 시시때때로 도착하는 남편의 택배 옷상자를 툭툭 한 번씩 발로 찰 지경이었다. 내겐 그저 오늘, 내일 다른 옷이면 될 뿐... 소재나 디자인의 디테일까지 염두해 본 적이 없던 패션의 세계였던지라 그 영역에 둔감한 나로선 모든 게 그저 눈엣가시였다.



어깨뽕이 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니트를 정리해 둘 열정이 없던 나는 어느새부턴가 그의 드레스룸에서 멀어져 갔다. 내 눈에 한없이 불필요한 맥시멀리즘 현장이 난 늘 미웠다.


거대한 옷장 하나를 안방 한편에 잠시 빼놨다. 안방 침대 옆 공간이 빼곡해졌다. 옷장을 잠시 이동시키고 나서도, 나무와 풀이 무성한 야생의 정글을 헤쳐가는 마음으로 드레스룸의 옷들을 지나쳐 실외기실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오 마이 갓.


#아내의 취향

실외기실 안의 고정된 선반을 비롯하여 실외기 주변의 최소한의 공간을 제외하고 가득 들어차있던 건 동화책들이었다. 아직 연령이 맞지 않아 차곡히 쌓아둔 책들, 내 입으로 다 읽어줬으나 아이들 눈으론 아직 읽은 게 아닌 책들, 언제 또 읽을지 모른다며 놔둔 책들이 즐비해있었다.


대략 이런 꽉찬, 벽면 책장 느낌, (출처 : 네이버 참고 사진)


남편의 욕심이 덕지덕지 녹아든 맥시멀리즘 옷 현장을 지나쳐 문을 열고나니 아내의 집착으로 얼룩진 책 무더기가 한가득이었던 게다. 난감해하시던 서비스 직원분께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책 박스들을 꺼냈다. 안방 파우더룸 한편에 책탑이 쌓였다.


남편의 옷들과 아내의 책들을 걷어낸 뒤에야, 비로소 냉매 가스 보충 작업이 시작될 수 있었다. 모두 정리는 돼있었기에 금방 조치는 취해졌었지만 비워진 공간 대신 채워진 공간이 생겨났다. 그리고 20분이 안되던 서비스 시간이 지나 수리 기사님이 돌아가신 후 200분의 시간 동안 비우기 작업이 이루어졌다. 철저히 아내의 책 취향만 정리되었을 뿐이지만.



암묵적인 합의로 어찌어찌 무시된 개개인의 취향들은, 부부 싸움의 시기가 되면 늘 공격 거리가 된다. 옷이 넘쳐나는데 또 무슨 옷이 필요하냐로 시작해서 책이 넘쳐나는데 무슨 책이 그리도 많으냐로 끝났다. 부부의 다른 취향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고 각자 한 발짝씩 물러날 때가 있을 뿐 엄밀히 행선을 걷고 있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흔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그럼, 결혼 전엔 서로 다른 체질도, 서로 다른 취향도, 몰랐던 건가? 하여, 때때로 각자의 취향이 개인의 고유한 영역을 넘어, 영역 다툼, 부부 싸움 이슈가 되는 건가? 


그렇다. 내게 그저 옷일 뿐, 남편에겐 울, 코듀로이, 스웨이드, 캐시미어 세분화된 소재로 나뉜다는 걸 알 턱이 없었다. 개키고 걸면 될 뿐인 나의 정리법은, 계절마다 바람을 치고 니트와 모자마저 칼각을 잡아야 하며 소재별로 옷이 망가지지 않도록 보관하는 법을 달리해야 할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았다.


미니멀리즘을 구현하기에 남편의 옷장은 꽤 고가의 물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애먼 동화책들만 한 무더기 정리했다. 아이들과 세 번, 네 번 읽었던 책들을 아쉬워하며 책 드림으로 나눴다. 못내 정리 못한 책들은 아이방 2층 침대 아래 벙커 안에 숨겨두었다. 또 다른 책탑이 쌓였다. 이미 아이방은 한 벽면 전체가 책으로 빼곡한 맥시멀리즘 책장이었던 터라.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신 남편의 컬렉션 중에서 때때로 나에게 맞는 것을 골라 오버핏랍시며, 멋을 내곤 했다. 결혼 후, 정작 나를 위한 물건 하나를 못 사는 나에게, 장바구니에 사야 할 물품을 골라놓고도 결제를 미루다, 쇼핑에의 의지가 쉽게 허물어지는 나에게 남편의 옷장이 쏠쏠한 옷 코디네이터의 픽 집합소인양.


만 6세의 아이들이 제법 똑똑한 소리를 할 때마다 주변에서 "책 많이 읽었구나~" 칭찬을 할 때, 아침에 눈 뜨자마자 책을 펼쳐드는 아이를 볼 때, 남편은 제법 그 공을 나에게로 돌린다.


집이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 취미 등 많은 걸 공유해야 하는 부부는, 인정과 합의, 양보는 필수. 아슬아슬하게 영역을 확보하다, 적정 선을 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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