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전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흑백요리사. '맛 하나는 최고라는' 재야의 고수인 '흑수저' 셰프 80명과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요리사 '백수저' 셰프 20명이 치열하게 맞붙는 프로그램이다. 저마다 한 가닥하고 왔다, 하는 흑수저 셰프들이지만 이름 없이 닉네임으로 떠도는 것일 뿐, 자기 이름을 내걸고 진정한 정체성을 갖기 위해선 100인의 요리 계급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해야만 한다.
20인의 '백수저'와 80인의 '흑수저'의 흑백 구도도 흥미로웠지만 내가 흑수저 셰프에 속하게 된다면 어떤 컨셉의 요리사 인지 상상하게 됐다.
안경테 너머로 부드러운 카리스마 눈빛 이 빛나던 '트리플스타'라는 닉네임의 셰프는, 내 눈에 가장디테일한 요리 실력이 돋보였던 요리사였다. 랍스터와 동남아풍 후추소스, 랍스터풍 키닐라우를 만들었는데... 음식도 음식이지만, 깔맞춤 한 소스통의 깔끔함 뿐만 아니라 저울에 계량해 가며 소스를 제조하는 정확함이 눈에 띄었다. 그의 요리 과정은 자로 잰 듯 한 치의 오차가 없어 보였고 맛도 그러하다는 평을 받았다.
철가방 요리사는 정식으로 요리를 배운 적 없이, 수년간 철가방 배달과 보조 요리사 등을 거치면서 요리를 배웠다한다.그는 동그란 통 양파에, 다짐육 반죽을 치대 감싼 것을 기름에 튀기고 속 양파는 빼낸 후 그 안에 팔보채를 넣어 음식을 만들었다.
내 눈엔 여느 중식당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크리에이티브한 요리이면서 파격적인 메뉴였다.먹어보지 않았지만 달큼한 양파와 고기 반죽이 노릇노릇하게 튀겨져 겉은 바삭. 안은 그 자체로만 먹어도 맛있을 팔보채가 따뜻할 음식 같았다. 정해진 레시피 틀을 벗어나고 자기만의 감성을 담아 요리한 그는 굳이 나눈다면 P형이 아닐까.
나는 한식 조리사 자격증 반을 수강하면서 기포 없이 부쳐낸 달걀지단을0.2×0.2 ×5cm로 재단해야 한다는 게 늘 불만이었다. 자도 없이 어떻게 0.2×0. ×5cm로 구현해 낼 일이며, 달걀지단에 한 톨의 기포도 허락하지 않으며 이렇게 빡빡하게도 요리해야 하는 걸까.
역사책 시대순 외우는 것도 아니고 '간, 설, 파, 마, 후, 깨, 참' 공식을 외워가며 간장, 설탕, 피, 마늘, 후추, 깨, 참기름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게 정서에 맞지 않았다. 물론 요리 초보자가 접근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었을지언정.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다는 목적 자체에 특수성이 있었을지언정.
나는 한식 조리사 자격증반 수업과 남도 음식 명인의 요리법이 공유되었던 향토 전통 음식 수업 때 배운 레시피 그대로 요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한참 모자란 요리실력이면서 무슨 패기인지 모르지만 레시피를 애초에 펼쳐 본 적이 없다.
한식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파스타 클래스에서의 레시피도, 브런치 카페 창업반 레시피도 마찬가지다. 이제껏 모아 왔던 레시피는 어디 간지도 모르게 사라지고 내 머릿속 어렴풋한 레시피와손이 기억하는 몇몇 조리법만 남았다.가로수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손님이 없어 서있는 시간 동안 눈으로 익혔던 셰프의 조리 현장과 그 주변을 뽀짝뽀짝 대며 주방 보조로 익혔던 비전문적인 스킬이 결합되었다.
그리고 요리할 때마다, 그동안 맛이 주었던 여러 추억들과 경험들을 살포시 꺼내든다.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엄마의 요리 베이스가 가장 클 테지만! 요리를 잘하는 비결 중 하나는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봤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어렸을 때부터 건강한 방식으로 맛깔난 남도 요리를 담아 집밥을 해준 엄마 솜씨가 내 손맛의 비결이라는 점에서 나는 행운아다.
거기에 더해, 통번역 일을 하며 곁다리로 먹어보던 '만찬'의 기억들을 꺼내본다. 춘천에서 먹었던 막국수의 새초롬한 맛, 안동에서 열렸던 유네스코 관련 행사 뒤 끝, 먹었던 안동 고등어 만찬의 담백함, 영암 코리아 그랑프리 포뮬러 원 대회 때 먹었던 개미 지던 남도 음식들, 제주도로 수행 통역 출장 가서 맛보았던 훌륭한 흑돼지 요리의 식감 등.전국을 떠돌며 먹어봤던,현지인 맛집에서부터 고급스럽고 정갈한 만찬들까지, 여러 맛들의 기억이다.
혼자 가는 여행 속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 숙박객이어도 밥은 맛있는 걸로 먹자, 혼밥마저도 잘 챙겨 먹었던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들. 두바이 호텔에 근무하면서 눈으로 곁눈질하던 5성급 호텔의 주방, 입으로 먹었던 필리핀, 인도 셰프가 있던 구내 직원 식당 음식들도. 맛있게 먹어본 기억들 모두 함께 향으로, 맛으로, 가미한다.
나는 레시피 없이, 계량 없이, 기억과 경험만으로 요리하는 흑수저 요리사. 냉장고 문을 열어, 그때그때 남아있는 냉장고 속 재료들로 냉장고 파먹기를 하는 살림이어도 맛있다, 칭찬해 주는 아이들 리액션에 신나서 요리한다. 날씨 따라, 마음 따라, 즉흥적으로 먹고 싶은 요리를 하고 그에 맞는 술도 내서 한 잔 기울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낙이 쏠쏠해 요리한다.
오늘은 바람결이 제법 쌀쌀하다. 여름 끝자락, '이제 가을이야', 말하는 듯 가을비가 추적추적이다. 오늘은 뭘 요리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