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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10. 2024

청소광이 아닙니다만,

서로 다른 '점, 선, 면'

떡볶이를 먹든, 순두부찌개를 먹든, 앞치마를 하고 먹든, 안 하고 먹든, 어느새 빨간 국물이 점점이 튀어있다.


커피는 분명 도도하게 홀짝 마셨을 뿐인데, 치마 아랫단엔 어느새 커피 얼룩이 묻었다.


세탁소에서 갓 찾아온 옷들인데 남편의 옷에선 볼 수 없는 주름이 잡혀있다. 주름 감지력이 높은 남편은 혀를 끌끌 차며, 세탁소 향이 아직 가시지 않은 옷을 아까워한다.


빨간 국물이 튈까 봐 조심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치마 주름을 신경 써서 앉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


애를 안 쓴 것도 아닌데 매번 들키고 마니, 양념 한 톨에 책 잡힌 일이라도 한 듯 속이 들끊는다.



유튜브로 '청소광 브라이언'을 보면서 복잡 다난한 청소도구의 세계와 신박한 청소법에 놀랐는데... 한 이불 덮고 자는 사람끼리도 이렇게 다른 시야의 사람들이 만날 수 있구나, 싶어 또 한 번 놀다.


가수 강남에겐 이 청소솔이 저 청소 브러시이지만 그의 아내 이상화 선수에겐 색깔, 모양별로 각기 다른 쓰임새의 브러시이었던 게다.


거실 큰 창 너머로 해질 무렵의 노을에 감탄하는 와중에, 훅 들어오는 유리창에 찍힌 지문 자국 이야기로 분위기를 깨는 집이 우리 집 말고 또 있다니. 안도했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어...



미술심리상담 강사님과 이야기하던 중에,

쌍둥이 육아하는 것도 힘든데...
육퇴하고 다 치웠다! 싶어도
집에 돌아와서 청소 지적을 하는 남편이
버거워요. 힘들어요.


라고 말했더니...


그 선들이 보이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불쌍히 여기세요.


대답하셔서 화가 난 적이 있다.


돌아서면 밥하고 설거지하고
하루종일 주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배달 음식을 안 시킨 것도 아니고 돈도 많이 썼어.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냥 종이 쪼가리가 막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소리는 소리대로 지르고
보람이 없어요. 보람이.
꼬부라질 참이에요. 지금.

- 육아 중인 코미디언, 김경아


육아 중에 소리는 소리대로 지르고, 집안일한 보람이 없어 꼬부라질 마당에... 최선을 다한다고, 청소까지 다 해놨건만 정리되지 않은 핸드폰 충전기 선 때문에 지적을 당하는 꼴이라니! 그런데도, 그 선을 불편해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니.



꼬인 선이, 불편하거든
조용히, 알아서 풀라...

공감을 바란 건 아니지만 내게 주는 공감 아닌, 타인을 향한 이해와 포용을 요구하는 듯한 말에 화가 났다. 늘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란 정해져 있는 것처럼.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내뱉는 첫마디가, '꼬인 핸드폰 충전기 선'이라면... 그걸 반가워하고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찌 선이 늘 올고 팽팽해야 한단 말인가. 꼬불꼬불할 수도, 울너울할 수도, 남실남실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안성재 셰프의 눈에는 어떤 선이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인다는 그 '점, 선, 면'에 대해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노력해 보기로 했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다'가 아닌 거니까. 브라이언 눈에 보이는 먼지 몇 톨 you crazy를 자아낼 수도 있고. 상화 선수의 눈에 지문 자국이 불편할 수도 있고. 안성재 셰프의 눈에 어떤 선이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니까.


 집에서,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람으로서 결혼 전에는 미처 몰랐던 점, 선과 자국에 대해 존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무거운 소파를 드러내고 소파 밑과 뒤를 청소하면서 인증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생색이라도 내지 않으면 소파 밑과 뒤의 점과 얼룩들과 씨름했던 내 땀들이 그대로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아서.



누군가에게는 자로 잰 듯 팽팽한 선의 세계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헐렁하고도 느슨한 너울 치는 파도 같은 세계도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설겁기만  빈틈이, 누군가에게는 숨 가쁜 압박일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넘나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청소광 브라이언을 보며 청소를 하다 전에 모르던 쾌감에 웃었다. 렁한 청소광이라도 일단 되어보기로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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