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장사 안 합니다
커다랗고 깊은 냄비에 물을 끓이다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소금 한 꼬집, 그리고 면을 넣어준다. 냄비 가장자리로 면을 빙 둘러 환하게 펼친다. 대대 하던 파스타 면이 한 풀 꺾이면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물속에 잠기도록 한다. 알덴테 Al Dente로 적당히 면 삶아주기. 면이 쫄깃해졌는지 한 가닥 떼어내어 냄비 안 쪽에 찰싹 던져보라고도 했지만 막상 그럴 여유가 없다. 스파게티 면을 한 가닥 베어 물어보거나, 잘라내어 면 속 하얀 심이 사그라들고 투명하게 되는 과정을 살피거나. 그리고 쫄깃쫄깃하기 직전, 약간 설익은 정도로만 대기시켜둔다. 올리브 오일과 잠시 버무려진 채로 여기서 잠시 기다리라며.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약간 두르고선 편 마늘을 튀기듯 볶아준다. 마늘 향이 베일 무렵, 노릇해진 마늘을 꺼내 기름을 빼내 준다. 너도 저기서, 잠시 대기해. 마늘이 바삭바삭 크리스피 조각이 되는 동안, 삼겹살 한 조각을 또다시 노릇노릇하게 구워준다. 핑크빛 속살이, 약간 타는 듯 구워져도 좋아. 구워진 삼겹살을 꺼내놓고 그에게서 기름을 빼내는 동안 썰어놓은 묵은지를 타닥타닥 볶아준다. 마늘향과 돼지기름이 적절히 베어 들어 묵은지의 매력이 배가 되는 순간, 이번엔 하얀 생크림 소스를 차르르 풀어주기. 파마산 치즈 가루와 버터도 가미해준다. 소스가 보글보글거릴 때쯤 썰어놓은 돼지고기와 어슷썰기 한 청양고추를, 기다리고 있던 면과 함께 버무려준다. 크림소스는 흥건할수록 좋음! 마지막 고명은, 크리스피 갈릭으로 솔솔솔. 예쁜 접시에 담아보는, 삼겹살 크림소스 파스타. 삼겹살과 크림소스 조합이라니 생각만 해도 느글느글한 거 아닌가요_누군가 물어볼지 모르지만... 그런 거 없습니다. 묵은지 깊은 맛과 청양고추 매콤함이, 싹 잡아줌. 베이컨과 크림소스, 계란 노른자 콜라보의 까르보나라보다 더 매력적이고 실패 없는 초이스.
내가 누군가를 초대할 때, 부담 없이 자신 있게 내놓는 메뉴 중 하나다. 드는 공력에 비해 파스타가 주는 세련미도 있을뿐더러 묵은지 찬스로 실패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비주얼도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데다, 여느 레스토랑 못지않은 맛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정통 파스타보다, 묵은지 매력이 녹아든 청양고추 크림 파스타가 더 맛있었다는 건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취향일 테지만 :) 간간하게 크림소스 머금은 쫄깃한 면발을 수저 위에 돌돌 말아 한 입, 남은 소스에 보들보들 빵을 찍어 한 입.
마음 한 켠 알싸할 때, 무언가 한 그릇이 생각날 때가 많다. 아마 위로받고 싶은 마음 이어 서일 테다. 멸치육수만으로도 깊은 맛, 장터국수 한 그릇. 성큰 성큰 썰어 넣은 애호박과 돼지고기 앞다리 살이 수북한 9천 원짜리 행복, 애호박 국밥 한 그릇. 올리브 유에, 해감한 바지락이랑 편 마늘만 넣고 후루룩 볶아만든 봉골레 한 접시. 장르가 그게 뭐든. 맛있는 그 한 그릇의 마법. 탱글탱글 국수 면발이 생생하도록 찬물을 재빨리 넣어주는 일, 스트레스를 다지듯 기계적으로 마늘을 다지는 일, 튀겨지는 편 마늘 향에, 기름에 고춧가루와 파를 넣어 매콤하게 고추기름을 내는 일. 요리의 모든 과정에 마음이 담긴다. 나를 위한 요리를 내어, 즐기는 그 순간, 든든해진다. 마음의 허기까지 달래진 느낌.
하지만 육아가 시작되고 나서 삼시세끼란 그저 숙제일 뿐이다. 출근한 남편도 없이, 등원한 아이들도 없이, 나 혼자서 고추참치 하나 뜯어, 함께 먹는 찬밥만큼 맛있는 게 또 있을까. 이름 거창하게, 육퇴 살롱이라고 이름 붙여보았지만 메뉴가 늘 빈약하다. 나를 위한 화려한 안주는 없다. 남편을 위한 든든한 야식은 더더욱 없다. 아이를 재우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온 내게, 간혹 남편이 묻는다.
”출출한 데, 라면 하나 먹을까? “
”라면은, 네가 끓여 잡수세요.”
말이 목까지 차오른다. ‘라면 먹고 갈래?’가 우리에게도 달콤한 신호였던 그 숱한 밤들은 어디로 갔을까. 파스타 따윈 메뉴에도 없는 육퇴 살롱. 피데기 한 마리에, 시원한 캔맥주만 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