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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14. 2021

클럽 마실의 밤

두바이 회식날, 쓰러진 한 마리 새

블링블링한 조명 속에 자유로운 몸짓으로 매력을 발산하고 싶었다. 즐거움도, 욕구 불만도, 춤으로 승화해보고 싶었다. 트렌디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몸짓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방송댄스반에 등록하기 전부터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일주일 한 번, 두 달간의 수업으론 쉽게 클럽의 문턱을 밟을 수 없으리라는 것. 그 달의 주제곡이 ‘싸이’의 ‘새’라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절감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클럽에 가보긴 어렵겠구나. 하지만 새라는 곡의 선정 미스와는 별개로, 나는 방송댄스반에서도 빈번하게 새가 되었다. 내 꼬인 스텝은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뻣뻣했고 방향치였다. 클럽에서 꿈꾸던 그 밤의 화려한 세뇨리따는 어디로 갔나.      







그래도 젊은 패기에, 이태원 클럽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의 클럽에 발도장을 찍었다. 그래 봤자 열 손가락으로 세알 릴 수 있을만한 횟수. 친구 따라 쭈뼛쭈뼛 가던 클럽 마실길이었지만.

  

(엄마, 왕년에... 이런 사람이었어.)   


역시나 클럽에서 늘 도망치거나 질색하기 일쑤였다. 사이키 한 조명들 사이로 뒤에서 허리를 감싸는 정체불명의 손이 불쑥이었다. 귓등 너머로 속삭이는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엉덩이 뒤로 밀착시키는 누군가가 있었다.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내 히스테리컬 한 반응은, 이태원을 넘어서 베이징 어느 클럽, 필리핀 시골마을 클럽에 이르러 두바이 호텔 클럽에까지 닿았다. 국경없는 스킨십 열전. 춤을 즐기기는커녕, 저항기제만 한껏 발동되었다. 새에서 불현듯 고슴도치가 되었다.     



 



두바이에서 근무하던 때, 두바이에선 호텔에서만 술이 허용되었다. 덕분에 호텔 클럽에서 자주 회식을 했다. 여러 동료들과 함께 갔던 회식자리에서 난 처음으로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되었다. 모두들 고향, 나라를 떠나온 꿈꾸는 새들이었다. 생계를 위해, 꿈을 위해, 두바이라는 먼 곳에까지 날아든 열정러들. 필리핀, 이집트, 튀니지, 네팔, 캄보디아, 일본, 한국 등 다양한 국적의 새들이 두바이 한 호텔에 둥지를 틀었다. 월급날이 되면 Money exchange 로 한 달음 달려가 고향에 돈을 부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끼니는 호텔 직원 식당에서의 삼시세끼로 해결하고 고향으로 전화를 걸기 위한 국제전화 충전 카드에나 돈을 썼다. 그런 까닭에 모두에게 호텔 클럽에서의 회식은 지구촌 대축제였다. 국적 불명의 전통춤들이 다 나왔다. 음악의 장르 따위 상관없었다. 돈 걱정 없이, 그야말로 고향에의 향수를, 가족에의 그리움을, 타지 노동에서 오는 고달픔을 모두 털어버렸다. 자유로웠다. 우리 몸 안에 고여있던 우울한 감정들도, 날 서있던 에너지들도. 모두 불태웠다.




멋쩍어하는 내게 고프란Gofran이 소리쳤다. 고프란은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에, 길게 말린 속눈썹이 매력적이던 튀니지에서 온 아이 아빠였다. 20대 초반의 무슬림인 그가 어떤 연유로, 아이를 둔 싱글파파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튀니지 민속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욜! 그냥 즐기면 되는 거야! 음악을 즐겨!


에라 모르겠다. 아랍춤 앞에 용기가 생겼다. 클럽 한가운데, 마음껏 소리 지르고 방방 뛰었으며 정체 모를 춤사위를 펼쳤다. 춤의 절정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에서 다 닿았다. 두바이 클럽에 모인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떼창을 불렀고 말춤을 췄다. 모두가 춤으로, 하나가 되던 밤이었다. We are the world. We are the one. 뭉클함과 자랑스러움 사이에서, 축배를 들었다. 손 등에 소금을 묻히고 핥은 후 쓰디쓴 데낄라를 털어 넣고 신 레몬 슬라이스를 베어 물었다. 그렇게 데낄라 라운드가 연거푸 돌았다.  우릴 위한 축배를 one shot.



 




그다음 날 동료들은 내게 말했다.     


(욜, 기억나? 네가 춤추다가 갑자기 삼성폰처럼 꺾였잖아...)


지난밤의 행적에 부끄러워하던 내 뒤로, 걱정하던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폴더폰처럼 몸이 갑자기 꺾인 채 쓰러져, 죽는 줄 알았다했다. 누군가는 시체처럼 축 쳐져 늘어진 나를 들 엎었고 누군가는 기절 모드로 잠든 내게 물을 먹였다고한다. 그 날밤의 회식을 강제로 마친 건 바로 나였다. 정체불명 춤신왕에서, 갑자기 풀이 죽은 새가 된 나.      







흥이라곤 없는 엄마, 아빠지만 쌍둥이들은 늘 흥이 많았다. 엄마가 아무리 소리쳐도 풀이 죽지 않았다. 말을 못 할 땐 옹알거리며 뽈뽈뽈 온 집을 기어 다녔다. 뛸 수 있게 된 뒤론 늘 방방 뛰었고 내달렸다. 직장생활을 하면 의레껏 불금이며, 주말을 기다리게 되기 마련인데 육아 일상 속엔 모든 요일이 월요일이었다. 시시때때로 업 up을 장착하는 발랄둥이들 사이로 점차 기력이 쇠해가는 엄마가 있었다. 그러다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의 나 맞닥뜨다.


이런저런 감정들이 뒤엉켜 엉엉 울던 날이었다. 소리내 우는 내 입 사이로 작은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꺄르르하는 한 아이와 똘망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조용히 매만는 한 아이가 있었다. 전 속력을 내며 돌진하며 뽈뽈뽈 기어 다니던 아이들이, 아장아장 걷고 다다다다 뛰게 되는 동안 못난 엄마는 숱하게 눈물을 훔쳤다. 그러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며 신나게 춤을 추는 아이들 앞에서 늘 쉽게 웃었다.


요새 남매둥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똥 밟았네' 다. 어설픈 발음으로 '거들먹 거들먹 걷다가' 떼창을 부른다. 평소에도 똥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보이던  쌍둥이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똥 밟았네' 라니. 엄마 입장에선 썩 교육적이지 않은 가사를 한글보다, 알파벳보다 더 열정적으로 외우려 노력했다. '똥 밟았네'를 부를 때마다 '꿀 먹었네'로 바꿔보기도 하고 제지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배속 똥밟았네' 노래에 맞춰 파닥파닥 리듬을 타며 흥에 겨워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 즐겨라. 즐거우면 그 뿐.'


아보니 마음 상태가 '그냥'일 때, 오롯이 행복할 때가 많았다. 목적이나 의도, 의미없이 그냥인 순간. 그냥 걷고, 그냥 볕의 따사로움을 즐길 때. 그냥 전화도 걸고 때로 그냥 내버려둘 때.


그냥, 나도 같이, 춤을 추었다. 자기들이 초대한 파티에, 비로소 엄마가 응한 듯한 느낌으로 더 신나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래, 엄마도 가슴을 쫙 펴니 십 년은 젊어진 것 같다.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모두 춤을 췄다. 오늘 클럽은 우리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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