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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24. 2021

사진 찍는 엄마

이탈리아 밀라노 

자주 투덜투덜 모드였지만 아이들과의 일상은 사실 8할은 설렘이다. 즐거운 연애戀愛다. 자신의 아이만큼 평생을 그리워하고, 사랑할 만한 대상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고심한다. 오늘은 무엇을 보여줄까. 오늘은 어떤 곳엘 갈까. 무얼 하면 신나 할까. 하지만 그 속에서 유익함도 꾀하게 되고, 배울 것들도 염두하게 된다. 가끔 욕심으로 꽉 채워 넣느라 가기도 전에 과부하가 걸리고 만다. 계절이 주는 매력에 집중하면서 매일매일 신나는 일을 도모해본다. 소소한 일상이 주는 아름다움을 아이와 함께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근사한 추억이고 싶어 하는 일들이, 아직도 내 중심일 때가 많다. 엄마나 아빠가 원하는 세팅을 만들어놓고 아이를 소품처럼 끼워 넣는 식이다. 원하는 그림이 나오도록. 


자동차 트렁크에 항상 돗자리를 구비해둘 것. 인적이 드물고 경치가 좋은 곳을 발견하면 어느 때든 돗자리를 펼칠 수 있게. 캠핑이고, 차박이고, 그런 거창한 단어가 아니더라도 컵라면 하나에, 보온병에 담긴 물 정도면 어디서든 감질맛 나지 않을까. 편의점 커피로도 충분하다. 만발한 봄꽃들에, 이미 기분은 로맨틱 감성 충만일 테니. 너넨 유기농 우유 한 잔 해. 달콤한 과일주스 말고, 쫀득한 젤리도 말고.







따뜻한 물을 솔솔 뿌려 분쇄된 원두 사이로 천천히 스며드는 그런 커피를 준비해본다. 점심 먹고 잠이 솔솔 오는 때에, 창가에 앉아 그 커피의 향긋함을 나른하게 즐길 수 있게. 너넨 그 옆에 앉아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어. 오늘 독후활동은 나뭇잎 그림 그리기야...


큰 창이 있는 카페를 알아두었다가, 봄비가 내리는 날에 가서 그 자리에 앉아본다. 창가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모두 세알려보겠다_말도 안 되는 심산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창 밖을 응시해본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은 비울 수 있도록. 그러다 이내 노래를 흥얼거린다. Rain rain go away. Come again another day. 비올 땐 이 영어동요. 너네도 잠자코 들어봐... (아이들이 고즈넉하게 빗소리 들을 새가 없다.)


그래 놓고 자주 사진을 찍는다. SNS에 올린다. 그것이 뿌듯함이든, 자랑이든, 푸념이든. 원하는 그림으로 컨셉을 맞추고 구도를 잡는다. 글을 써넣는다.


(아이와 함께 한 이후로 일상이 다른 결로 새로워졌어!) 


그동안 많은걸 놓치는 줄도 모르고.







새로운 맛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 넣었을 때 커지는 동공. 이불 정리하는 두 손, 무색하게 까르르 달려드는 네 손들. 두 계단을 껑충 뛰며 으쓱해하는 표정. 물에 씻어준 라면 몇 가닥에도 호호 불며 낼름낼름하는 작은 입,  잠들 기 전에 꼭 물이 마시고 싶다며 애틋하게 바라보는 두 눈.    


40개월 인생에, 얼마나 배움을 채워 넣고 싶은 걸까. 어떻게 빚으려는 걸까. 


아차,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애쓰려다 그르치는 것보다 적당히 행복하면 될 일이라고. 그들이 모으고 모은 단편적인 기억들이, 훗날 삶을 살아하는 데 있어 행복한 원동력이 될 정도로만. 다 기억나진 않아도 어렴풋하게, 따뜻함이 깃들도록만. 따뜻한 감성이, 자연의 귀한 생명력이 전해질 정도로만. 







여행 갈 때마다 늘 꾹꾹 채워 넣던 사진들이었다. 혼자 여행하는 때엔 사진 찍어줄 다른 손이 아쉬웠다.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밀라노로 가는 새벽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도 연신 사진을 찍었다. 기차 밖으로 하루 어느 때보다 고요하게 흐르는 풍경을 내어주었지만 11.30유로짜리 기차표 한 장 마저도 인증샷이 되었다. 기차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투박한 설컹거림, 똑같은 듯 다르게 펼쳐지는 잔잔한 경치들을 몇 놓쳤을 테다. 하지만 내 눈 안에, 마음속에 충분히 담아두기보다 흔들리는 순간마저 포착하려 애썼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내 발보다 더 바빴던 건 사진 셔터 누르던 손가락이었을 테다. 


밀라노의 거리를 혼자 거닐다, 저녁 무렵 분수에 이르렀다. 딱 석양 넘어갈 절묘한 타이밍에 도착한 분수대 앞에서 마음이 급해졌다. 사진 찍어야지! 부산스러워진 내 마음이 보였는지 어느 친절한 이탈리아인이 사진을 찍어주겠노라 먼저 물었다. 고민 없이 예스! 그런데, 몇 장 찍기도 전에 분수대 안으로 빠져서 물거품이 된 카메라. 풍덩 소리와 함께 나의 외마디 소리마저 분수대에 울려 퍼졌던 탓에, 온통 관심이 집중되었다. 빛의 속도로 카메라를 건져 메모리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친절하던 행인은 어디로 가고 난처해하는 기색만 역력했다. 애써 괜찮다, 말해줬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눈에 안타까움이 뿜어져 나왔다.


오호 통제라. 내 여행 인생, 통틀어 가장 통탄스러웠던 순간. 


그동안 차곡히 담았던 유럽에서의 기록들이 물거품이 되고 오롯이 내 머릿속 추억으로만 남았다. 카메라 없이 터덜거리며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누볐다. 그리고 가장 한긋지고 여유 있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역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요시타카와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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