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토론토, 뒤늦은 인사
현실 살림은 늘 맥시멀리즘 발현 중이지만 마음만으론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고 있다. 먼지 가득 쟁여놓은 살림들과 빈번하게 안녕하는 중인데... 특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시때때로 버리고 정리하고 다시 쟁이는 살림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어쩐지, 사계절 내내 순환이 잘 되지 않는 곳이 있다. 아이들 책방이 그렇다. 간혹 읽을 연령이 다 지난 책들이 있어도 쉬이 정리를 잘 못한다. 나가는 책들은 드문데, 들어오는 책들은 많다. 욕심만큼 많이 읽히지 못하면서... 엉겁결에 예전 내 책들이 주섬주섬 내몰려나가는 중이다. 책 정리 중에 호밀밭의 파수꾼, 책을 집어 들었다.
홀든은 어니 클럽에서 나와 호텔로 혼자 걸어간다. 그리고 12층 아파트로 걸어 올라가던 어린 날을 회상한다. 눈이 오지는 않았지만 매섭도록 추운 날이라 했다. 눈, 아파트, 혼자 걷던 길. 호밀밭 파수꾼에서 이 세 단어들을 무심코 읽어 내려가다 오래전, 캐나다를 떠올려봤다. 토론토의 겨울도 매섭도록 추웠다. 머리를 말리고 밖으로 나왔는데도 내 머릿속 수분이란 수분은 모두 얼려버리겠다는 듯 심술을 부렸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다 사그락사그락 얼음이 맺혔다. 뭐지, 하면서도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맺혀 사그락 거리는 느낌이 싫진 않았다. 차가운 얼음으로 코팅된 머리카락을, 튼 손으로 매만지곤 했다. 넘어질세라 차분히 눈길을 걸었다. 브라운 톤의 벽돌 아파트로 들어가면 늘 안도감이 느껴졌다. 퀴퀴함 가운데 안온함이 서려있었다. 캐나다에 있는 동안 길을 잃었을 때 '우리 집이라오' 내밀 수 있었던 유일한 주소지였다. 방 2의 아파트였는데 모두 여성 명의 식구가 살고 있었다. 작은 아빠, 작은 엄마 내외와 두 명의 사촌 동생들이 본래 가족이었다. 거기에 한국에서 오신 외삼촌과 외사촌인 내가 숟가락을 얹어 식구가 되었다. 하지만 집 안에 온 가족들이 동시에 북적이는 때는 드물었다. 잘 차려진 밥에 여섯 식구가 모여 앉아 밥을 먹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긴 대화가 오갔던 적도 없다. 작은 아빠와 엄마, 외삼촌은 대부분 식당에 계셨다. 이민 간 이후로 어렵사리 돈을 모아 한국 일식당을 오픈하셨다고 했다. 식사 때가 되면 대부분 식당에서 포장해온 음식들을 각자 먹었다. 나이 차이가 나던 사촌동생들과는, 내가 맥도널드 햄버거 세트를 사들고 집에 들어왔을 때만 모여 앉았다. 평소엔 시니컬하던 녀석들이 그때만 ‘누나, 이거 어떻게 사 왔어?’하며 햄버거를 반겨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맥도널드는 어떻게 사 왔냐는 거였다. 캐네디언 국적의 사촌동생들에겐, 대학생이던 내 영어실력마저도 어눌하기 짝이 없던 모양이었다.
(그 정도 영어는 할 줄 알아 인마.)
숙모가 집에 계시던 때는 아주 드물었다. 가끔 집에 계실 때, 그녀는 언제나 화장대 앞에 계셨다. 화장을 하던 숙모의 모습은 우리 엄마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 생소했었다. 샤넬 화장품의 화려한 잔향들을 풍기면서 지나가시던 숙모가 멋져 보였다. 하지만 대화를 나눴던 적은 거의 없었다. 캐나다에서 숙모는 내가, 가장 눈치를 많이 봤던 사람이었다. '왜 내 어학연수 생활에, 매번 딴지를 거시는 걸까' 이해가 가장 안 된다 했던 사람. 그래서 잠시 미워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늘 숙모는 토론토하면, 이퀄처럼 성립되었다. 그렇다고 딱히 '안부'란걸 물어야겠다 마음먹었던 적은 없었지만. 숙모와의 기억이라면 죄다 서운했던 기억들만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던 까닭이다. 수업이 끝난 후 숙모가 잠깐 시켰던 아르바이트 식당일에 야속해했던 기억. '차라리 홈스테이를 할래요.' 하고선 집을 나갔을 때 그녀가 했던 싫은 소리에, 속상했던 기억. 캐나다에서의 나의 일상을 속속들이 엄마에게 말했던 숙모에게 분노했던 기억.
그래도_감사 인사 정도 드려야겠다, 막연하게 생각했다. 취직을 하고 나면 그때. 결혼을 하고 나면 그때.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임신을 하고 나면 그때. 하지만 숙모에게 ‘실은 감사했었다'라고 말하려고 했던 '그때'는 반복되는 일상들에 자꾸 밀려났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비보가 전해져 왔다.
(캐나다 숙모가 돌아가셨대. 자살하셨대...)
충격적인 소식에 다시금 되짚어봤다. 화려하게 기억되었던 숙모의 모습에서 우울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릴 수 없었다.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요즘 육아 일상 중에서도, 꽤 빈번하게 숙모가 생각이 났다. 나 혼자만으로도 버거운 일상 속에 내 아이도 아닌 다른 아이를 맡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내가 '간섭'이라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나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들만으로도 부담감이 스멀거릴 때. 출근하는 자매 대신 아픈 조카를 잠시 맡아주겠노라고, 선뜻 답이 나오지 않을 때. 잠깐 손주들을 데리고 외출 나갔다가, 소나기를 맞혀 돌아온 친정엄마에게 괜히 탓하는 마음이 들 때.
뒤늦게나마 오랫동안 품고 있던 기억들에 사과하고 싶어졌다. '그때 실은 감사했었어요.'말하고 싶었었다. 그러기에 때는 너무 늦었지만. '고맙다'라고 말하기에 '적절한 때'라는 건 없었는데. '이제 안부를 물을 만 하다_ 싶을 정도의 때'라는 것도 없는데. '그땐 제가 철이 좀 없었죠.' 부끄러운 고백에 적당한 때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난 그 말 한마디를 못하고선 마음 불편 해했던 걸까.
(잘 지내시죠. 인사가 늦었어요. 고마웠어요. 건강하세요.)
인사를 건네기엔, 그저 그 사람이 떠올랐던 그때가 최적이었는데... 마음을 전하기에 정해진 때라는 건 없었는데. 어쨌거나 난 타이밍을 놓쳤다. 숙모에 대한 비보를 접하고 난 후로도 오랫동안 용기를 내지 못했다. 캐나다에 남겨진 가족들에게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이젠 조심스럽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사랑이 필요할까. 우리에겐 <공지영, 시인의 밥상>에서처럼 아주 작고 따스한 안부 하나만큼의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랬다. 아이의 작은 입에서 나오는 몇 마디 말들에 감동할 때가 많았다. 늘, 별거 아닌 말들이다. '미안해. 고마워. 예쁘다', 라는 칭찬. 그 간단한 말 한마디에 화난 마음이 녹기도, 따뜻해지기도 했다. '엄마는 너무 예뻐' 말에 눈물이 핑 돌았던 적도 있다. 결국 호밀밭의 파수꾼은 정리하지 못했다. 대신 어렵사리 남은 가족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이런저런 말 없이, 그냥 '잘 지내시죠' 짤막한 인사. 그뿐이었던 싱겁던 안부인사. 대단한 인사를 할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뜸은 들였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