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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Aug 06. 2022

이런 친구 또 없습니다.

친구, 산책길.

"말하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줘야 하고

무슨 말해야 하나,

생각해내야 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를 보면서 공감했던 대사 하나.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고개를 끄덕였던 대사 둘.


이상할 일이다. 나는 나름, 그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왁자지껄 분위기 메이커까지는 아니더라도 늘 대화의 중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공감 간다며 머릿속에서 밑줄 긋기 하는 대사들은

온통 저런 톤이었다.


서로 다른 범주의 사람들로만 일주일을 꽉 채워

사람들을 만났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교감들,

함께 했던 시간들, 나눴던 대화들은 어디로 가고

지금 내게 남은 관계란 열 손가락 안에, 세알 릴 수

있을 정도로 편협하다.


그리고 그 마저도 산책길서의

시간들로 대체했다.


말하지 않는다. 들어줄 필요도 없다.

망설이면서 답해야 할 질문도 없다.

대화의 공백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꾸미지 않아도 된다. 훑지 않으니까.


요구하지 않고 온통 채워주기만 하는 든든한

친구 같은 느낌.

내가 어떤 감정을 안고 마주해도,

아무래도 괜찮은 그런 사람.


거친 호흡을 쏟아내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며 땅만 보고 걷기도 했던 그 길에

오늘은 아침 일찍 눈뜨자마자 나섰다.


여느 때처럼 며칠 전과는 다른 풍경들을 내어주었 잊고 지내던 자연이 말하는 소리 들려주는

산책길에서 비로소 '안온함'이란 단어를 찾았다.


난임 일상 속, 간혹 눈물을 훔치며 혼자 걷던 때와

함께 걸어주던 친정엄마에게

불친절한 말들을 쏟아내던 때를 떠올렸다.


오지 않는 아이들에 애태우면서 힘들어하던

그 길 위에, 이제 육아 일상 속 버거워하는 내가 서 있다.


길을 걷다, 아이의 작은 손톱을 물들일 만한

봉선화꽃을 찾았다. 마트에 들러 가는 길에 꽃잎과

잎 몇 장을 뜯어갈 요량으로 찜해놓았다.


마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마트에서 여분의

비닐봉지를 하나 얻어다가 산책길 위 쓰레기들을

주워왔다.


오늘은 봉선화꽃을 산책길에서 얻어갈 요량이어서

쓰레기를 더 주워야지, 의욕 넘치게 시작했는데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금세 쓰레기로 가득 차고

마는 비닐봉지였다.


한가득 담긴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꾹꾹 눌러 담고 있으려니 모르는 할머니 한 분이 내게 다가오셨다.


코로나 기승으로 또다시 낯선 이들과의 거리에

예민해지는 때라 나도 모르게 움츠려 든 사이

할머니는 내 어깨를 툭 치고 가셨다.


굳이 나 들으라고 한 소리도 아닌, 작게 웅얼거리는

한 마디 사이로 "지저분... 착한"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이전에도 아이들과 함께, 아님 나 혼자 나선 산책길에서도 곧잘 쓰레기는 주우며

걸었지만 누군가 내게 와서 어깨를 다독거린 적은

처음이었다.


요 며칠 사이, 움츠려들 대로

움츠려 들었던 내 마음을

다독거려준 기분이었다.


완벽하지 않지만 성심껏 마음을 다해왔는데

고작 돌아오는 건 폄하 어린 몇 마디여서

마음 상해했던 요즘이는데!


말로, 몇 대  것 같았던...


인간관계가 그렇게 예전만큼 폭넓은 것도 아닌데

깊으면 깊다고 할, 몇 안 되는 관계 속에서

시시때때로 상처받는다는 것이

의아할 일이었다.


하루 몇 번이고 건망증에, 아차! 를 연발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소수가 남기는 몇 마디가 맴돌고 맴돌아

마음속까지 후벼 판다 싶게,

생채기를 남기는 것이 억울다 싶었다.


그런데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게 일상인 사람에게,

버리지 못하고

삼키지 못해서

첩첩이 쌓아두는  어리석다며 도리어 나를 탓했다.


며칠 잠을 못 잤던 날들 끝에

정신없이 일어나자마자 맨 얼굴로 찾았던

그 길 위에서 예상치 못한 다독거림을

받으니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다.


산책길은 오늘도 나를 그냥 돌려보내진 않는구나.


누군가가 심어놓은 꽃들을 보면서

서툰 식물 집사 손에서 벗어나면

나도 아이들과 다른 이들을 위한 꽃을

산책길 한편에 심어야겠다 다짐하며 돌아왔다.


오늘은 쓰레기 주워가는 대신

봉선화꽃은 조금 따가고

내일은 꽃을 심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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