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cc
이번 여행의 시작점
버스는 두 시간 여를 달려 kl 센트럴 터미널에 도착했다. 사람들을 따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건물 위로 올라가니 여느 버스터미널처럼 매우 북적거렸다. 짐을 한가득 옆에 둔 채 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는 사람들,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있으니 마치 명절날의 터미널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나에게 이곳은 서울 3대 미로 중 하나인 반포 고속터미널역처럼 복잡했다. 그랩을 타야 하는데, 당최 그랩존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여기저기 터미널 안을 구경할 겸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뚜가 피곤해할 것 같아 멀리 안내판의 글씨만 보고 얼추 때려 맞춰 가며 엘리베이터를 내려갔는데, 어느새 터미널 건너편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가 맞나? 그랩존이 따로 있다길래 버스 장류장처럼 뭔가 시설물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길가다.
일단 그랩을 켜보니 위치가 잘 잡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탈 수 있나 보다. 말라카에서 한 번 해봤으니까 더 용기 있게 그랩을 불렀다. 그랩을 부를 때마다 왜 떨렸냐면, 난 카카오택시 앱을 최근에 깔았을 정도로 평소에 택시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동네 구경 하는 걸 좋아해 지하철보다도 거의 버스만 타는 사람인지라 이런 류의 앱이 생소했다.
대도시니까 차가 빨리 잡히리라는 기대와 달리 의외로 멀리에서 잡히는 바람에 꽤 기다렸다. 당연히 날은 더워서 대기 중에 또 땀이 쏟아졌다. 뚜의 얼굴도 벌게졌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어느덧 이렇게 온몸이 땀범벅이어도 크게 부대끼는 느낌이 없다.
드디어 그랩 택시가 왔고 내가 또 성공(?)했다는 기쁨에 기사님께 웃으며 인사를 하고 출발했다. 싱가포르에서 공항-숙소 이동을 할 때처럼 쿠알라룸푸르 숙소를 가는 동안 도시 구경을 열심히 했다. 이곳은 고가도로와 고층 건물이 매우 많았는데, 군데군데 도시의 느낌이 서울과 매우 비슷했다. 다른 건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다는 정도. 나중에 투어 때 안 사실인데 우리나라 건설회사에서 쿠알라룸푸르의 많은 건물과 시설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동네에 이질감 없이 금방 적응이 되었던 것 같다.
중심가로 들어갈수록 많은 사람들과 큼직한 건물들이 보이길래 신나게 바깥 구경을 하다 보니 드디어 도착했다. 우리가 묵을 스타 레지던스는 실제로 개인이 살고 있는 호실도 있고, 여러 업체들이 몇 개 층이나 몇 개의 호실을 가지고 관리하는 것 같았다. 총 세 동이 있는데 각 동마다 체크인하는 업체명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리 안내받은 대로 타워 1 로비 한 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체크인을 하고 올라갔다. 드디어, 이번 여행 중 가장 길게 머무는 쿠알라룸푸르 9일 살이(?) 시작이다.
문을 열고 숙소에 들어가니, 뚜가 와! 소리를 냈다. 숙소는 싱가포르나 말라카 같은 침실 하나만 있는 방이 아니라 번듯한 거실과 주방이 먼저 나오고 옆에 침실이 따로 있는 구조였다. 침실에 들어가 커튼을 걷으니, 양쪽 고층 건물 사이로 고대하던 그 건물이 조금 보인다. 바로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물론 전체가 다 보이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렴 어때, 이 정도 근거리에서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압도되는 느낌에 감탄만 나온다. 한참을 바라보다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니 수영장이 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에서의 9일이 설렌다. 뚜는 수영장을 보자마자 얼른 내려가고 싶다고 성화였다. 숙소 내부나 시설, 뷰 모두 맘에 들어서 바로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구석구석 보여주고 다음에 같이 오기로 약속했다. 남편이 휴가를 마음껏 쓸 수 있는 날이 꼭 왔으면.
영상통화를 끝내고 뚜와 샤워를 한 후, 일단 누웠다. 말라카에서부터 여기에 오기까지 맘 졸이고 긴장했던 순간들이 머리에 주르륵 지나갔다. 무사히 도착하고 나니 일단 좀 쉬면서 피로를 풀고 싶었다. 뚜도 버스에서 그렇게 자고도 피곤했나 보다. 어느새 나와 뚜 모두 꿀 같은 낮잠에 들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밖이 살짝 어둑해지려는 때에 우린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여기는 취사가 가능했기에 마트에서 고기부터 사고 싶었다. 지금까지 뚜가 제대로 든든한 한 끼를 먹은 적이 별로 없어서 비쩍 말라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기로 단백질부터 두둑이 채워주고 싶었다.
여기서 도보로 쇼핑몰을 가는 지름길이 있다고 인터넷 카페에서 봤기에 일단 1층으로 내려왔다. 우리가 있는 건물은 총 세 동으로 되어있는데, 우리가 있는 타워 1 말고 타워 2동으로 돌아가면 앞쪽 길 건너에 쇼핑몰로 갈 수 있는 골목길이 나온다.
혹시 몰라 2동 안내데스크에 한 번 더 물어보고 확인을 한 후, 첫 동네 탐방을 시작했다. 쿠알라룸푸르가 치안이 좋다고는 했으나 으슥해 보이는 골목 입구를 보며 혹시나 하는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이 지름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꽤 있나 보다. 어떤 가족 일행이 같은 길을 가기에 우리도 얼른 뒤따라갔다. 3분 여를 걸었을까. Avenue K 쇼핑몰 후문이 나왔다. 쇼핑몰만 보면 왜 그리 신나고 업될까. 근데 그건 나만이 아닌 듯한 게 뚜도 옆에서 폴짝거린다. 둘이 손을 잡고 흔들며 1층을 한번 둘러보고 내일부터 여길 샅샅이 구경하기로 하고 마트부터 찾았다. 마트는 쇼핑몰 지하에 있었는데, 지하에 카페나 피자, 햄버거 같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곳들이 많았다. 마트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미소로 가득 찼다. 내가 사랑하는 과일들이 참 예쁘게 한가득 모여 앉아 날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뚜야, 먹고 싶은 과일 골라! “
우린 사과, 망고를 한 봉지 담고, 소고기 때깔을 하고 있는 싱싱한 돼지고기와 라면, 안에서 마실 물 두 병을 샀다. 얼마 만에 고기구이냐.
아, 이 숙소에는 단점이 두 개 있다. 호실마다 복불복이겠지만 냄비, 프라이팬의 코팅이 다 벗겨져서 너덜너덜하다는 것과 샤워필터가 금세 누레진다는 점이다. 샤워필터야 넉넉히 가져왔으니 자주 갈면 된다지만, 조리도구는 여기에 계속 해먹다간 몸에 매우 해로울 것 같았다. 최대한 코팅이 벗겨지지 않은 쪽으로 고기를 이쪽저쪽 굽고 딱 한 번만 눈을 질끈 감고 냄비에 라면을 끓였다. 조촐해 보이지만 언제나 배고픈 나와 한식파였다는 걸 깨달은 뚜, 우리 둘 다 오랜만에 훌륭한 만찬을 즐겼다.
과일까지 먹고 산책 겸 야간 수영을 해보기로 했다. 6층 메인 풀장을 내려가기 전, 예약 때부터 사진으로 많이 봤던 루프탑 수영장부터 올라가 봤다. 와,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더 잘 보인다. 야경 맛집답게 밤에 조명이 켜진 페트로나스는 낮과 비교할 수 없이 호화롭고 아름다웠고, 사진을 그냥 막 찍어도 빛이 났다. 만약, 우리가 처음 그대로 한 달 살이를 했다면 이 야경을 한 달 내내 보며 지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쿠알라룸푸르는 우리가 이 여행을 오게 된 첫 시작점이었다. 한 달 살이도 우린 분명 그 나름대로 좋았겠지만, 뚜의 말을 듣고 이 여정을 선택하길 잘한 것 같다. 우리는 우리만의 이 여행이 참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