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식물이 완벽하게 죽었다. 손톱 하나 만큼의 숨도 붙어있지 않고 한때 그를 가득 채웠던 빛과 물기조차 다 말라버렸다. 이 식물애호가, 혹은 가드너, 식물이 취미인 음악가, 서울의 작은 집에서 키보다 큰 야자나무를 키우는 사람은 미련없이 화분을 엎는다. 쓰레기봉투에 죽은 식물을 옮기고 흙을 처리한다. 거기엔 어떤 감상도, 애면글면도 없다. 그건 그이가 식물과 생의 어느 구간을 동반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내 감정의 일부를 묶어두고 식물의 죽음이 가져가버린 마음이 뜯겨져나간 자리를 보면서 경악하는 자기연민이 아닌 - 발아하고 자랐다가 죽음을 맞이한 식물을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로, 반려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이는 자신의 허무와 우울을 안전한 초록색 원안에 가두어준 식물을 더이상 구원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되돌아보면 삶의 변곡점이었던 순간도, 그 시간을 지나가는 순간에는 어제와 비슷한 오늘일 뿐이다. 비슷하지만 무언가 다른, 그 당시에는 의미도 몰랐던 아주 작은 선택이 나를 다른 풍경으로 채운다. 우연 혹은 기적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내민 손이 붙든 지푸라기다. 안간힘이다.
푸릇푸릇한 식물들과 도시의 귀퉁이에서 생의 어느 시간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나 역시 식물에 무지했기에 그녀의 작은 숲이 온전하기 위해 기울어야 하는 많은 일들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섬세하지 못한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나는 엄두도 못낼 일이다. 다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고요하게 푸른 그늘을 드리우는 잎사귀, 흙에서 풍길 고소한 냄새, 들리지는 않아도 제 나름의 속도로 물을 빨아올리고 숨을 뱉을 그녀의 숲이 조금은 부러웠다고 할까. 그녀는 식물을 보호하고 식물도 그녀를 보호하는 완전무결한 상호보완관계. 어여쁜 녹빛 원이.
서서히 죽어주는 식물이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 열 몇 개의 씨앗에서 겨우 하나만 발아해 뿌리를 내리고 이윽고 잎을 티우고 자라나다가 죽는 - 식물의 온전한 삶. 한 때 그이 옆에 머물러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고 완벽한 보호를 줬던 한 식물이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그이는 아직 살아있다, 다른 식물들과 함께. 내일 아침 일어나 물을 주고 잎을 닦아줄 식물들이 있고, 그렇게 삶은 이어진다. 둥글게, 둥글게 맞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