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를 잃었지만 그는 승리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정복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정복인 스스로를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 순간 목숨을 거뒀습니다. 우리 모두 그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기리게 될 것입니다.
- 윌키 콜린스 <얼어붙은 땅> 중
반지의 제왕에는 정령의 세계로 건너가는 여행이 나온다. 신성한 것들은 인간의 세상을 떠난다. 모든 신비가 사라지고 풀에 쓸린 종아리처럼 생생한 인과만이 남았다. 그때부터 였을까. 인간의 세상이 위태로워진 것은.
꿈속의 여인에게 생일날 새벽 2시에 살해당할 거라는 믿음이라던가 가문의 저주로 내려온 천리안이라던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선한 여인의 잠옷 단추를 하나하나 공들여 잠가주듯이 아귀를 맞춰 일어나는 사건들 - 윌키 콜린스의 시대에는 이미 신성한 것들이 사라지고 인간의 세상은 비탈을 굴러떨어지듯 숨 가쁘게 가벼워지고 있었을 테지만. 그는 어슴푸레 흔적이 남아있는 견고한 것들, 영원한 가치들, 인간의 영혼이 거니는 새벽의 풍경을 그려내려고 한다. 너무 오래전 잃어버린 이야기라서 되려 숨이 가빴다.
신의 시대가 사라지고 인간의 시대가 남은 이유는 하나. 인간은 끝없이 신에게 저항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신탁을 그대로 따르는 유순한 짐승이 아니라 운명에 저항하고 스스로 생각해 만들어낸 고결한 가치를 따르는 자였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그래서 인간의 치명적인 결점이 되는 감정 - 사랑, 욕심, 매혹, 죄책감, 자기부정 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의 묵정밭을 걷는 힘이다. 윌키 콜린스가 재기발랄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이야기들이 늘 그러하듯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구하는 일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도취될 수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죽는 순간 그 여인에게 감사의 키스를 받고 싶은 마음이 질투를 누른다. 자신의 마음을 깨뜨린 여자에게 복수하고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며 여자의 미움을 받는 것보다는, 고결하고 멋진 남자로 그 여자의 기억 속에 무덤을 파고 눕고 싶은 마음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건 신의 세계에나 나올법한 숭고한 희생이 아니다. 인간의 에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복잡한 마음에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한다. 그의 인간다움에.
예언의 여인이 기어이 따라와 침대를 피로 물들여도 그 여인은 인생의 막다른 길에 몰려 망가진 사람이고 자신이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순간을 불꽃으로 사르며 죽어가기를 원했던 나약한 자이다. 그녀가 칼을 꽂아야 했던 것은 잘못 걸어온 자신의 인생이지만 나약한 인간이 그러하듯 죄는 남에게 돌리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가여운 말구종은 사랑했기 때문에 죽어야 했다. 사랑에 망가졌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여자, 그래서 남편의 두려움이 파멸의 신호탄처럼 반가웠던 여자. 이 복잡한 인간을 작가는 발랄하지만 절제된 문장으로 끌어나간다. 그의 비밀은 결코 폭로되지 않지만 우리는 문장 깊숙이 손을 넣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영혼을 만진다.
그러나 어떤 인간은 순결한 감정에 스스로를 못 박을 줄도 알아서, 사랑을 했던 순간에 머무르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얼음 같은 사랑 속으로 가라앉는 여자. 그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해성사를 받은 신부도 모를 것이다. 쌍둥이 여동생에게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넘겨줬을 때 그녀의 심장에 피어난 장미. 시들지 않는 비밀. 겹겹의 꽃잎을 들추고 미로 속에 길을 잃어도 결코 찾을 수 없을 어떤 순간.
모든 선택은 인간의 의지로. 바다로부터 불길한 바람이 불고 무아지경의 예언이 회색 눈동자에 쓰이고 집집마다 장롱 속엔 해골 하나쯤 감추고 있다지만 - 이미 신탁의 시대는 우리를 떠났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을 복원하는 일이다. 신을 떠나보내고 인간마저 휘발되는 위태로운 시간을 살고 있지만 고맙게도 우리에겐 이야기가 있으니까.
가만히 팔과 다리, 머리카락을 매만져 본다. 경보가 발령된다. 안개가 자욱한 길. 모퉁이를 돌고 숲을 지나 캄캄한 다리 아래를 달려 나도 모르는 정원에 닿으면.
거기 아름다운 장미가 있다. 내가 감춰둔 비밀이. 나의 에고가. 살냄새 나는 인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