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인간도 한 인간의 신이라는 것을 신이라서 울 수도 한숨 쉴 수도 무너질 수도 없다는 것을 신은 모른다 긍정과 낙관만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인 인간의 비참한 머릿속을 막 이사 온 옆집 사람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그따위 미천한 감정을 신은 모른다
김개미 <신은 모른다> 중
나는 너의 추억을 살아,라는 말이 달콤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이미 그 사랑을 지나왔다.
아직 추억으로 밀려가기 전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견디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가만히 있는 법을 택했다. 늘 그랬다. 풀죽은 꽃이 무심하게 밀려가는 구름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냥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만 가만히 있고 사방은 나를 두고 변해버려 눈을 감았다 뜨면 알 수 없는 곳, 알 수 없는 일들. 한 번쯤은 내가 일어나 걸어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 풍경을 뒤로하고 안개 너머 눈보라 너머 빗방울 너머로 떠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상처 옆에 가만히 엎드려 피 흘리고 곯고 비명을 지르다가 서서히 아물고 새살이 돋고 가늘고 붉은 흉터가 남는 것을 지켜봤다.
이 시인은 상처가 아무는 것을 견딜 수가 없나 봐. 소금을 뿌리고 흙을 뿌리고 상처의 컴컴한 아가리에 대고 소리치며 이름을 부른다. 사랑이 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아무리 아파도 시인에게 너는 현재진행형. 이토록 스스로에게 잔인할 수 있나 몸서리치다가도 문득 깨닫는다. 사랑이 지나가면 공허만 남는 것을, 그에게 이 사랑은 실존이며 구원인 것을.
그러나 나에게 누군가 사랑을 모르는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러시겠어요?라고 묻는다면 웃으며 고개를 저으리라. 사랑을 묶어두는 것은 떠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아무 말 없이 웅크리지만 내게도 사랑은 실존이며 구원이었기에 몸의 일부로 만든다. 찬란했거나 어두웠던 그 모든 시간들은 내 몸속에 있다. 상처는 아물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는 몸속에 묻힌다. 시간이 새로운 계절의 흙을 바람에 실어와 상처 위에 덮어주지만 새 살 아래 가만히 보렴, 저 붉고 가는 흔적, 파괴된 기억을 품은 세포들. 다친 몸은 날씨를 먼저 알아 날궂이를 하고 시큰거리는 통증을 살며시 손으로 쓸어보며 그래, 나는 너를 살았지. 너의 추억을 살았지.
애인의 집에서 옛 연인의 흔적을 발견했다며 붉은 눈으로 우는 친구의 손등을 토닥였다.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일부잖아. 살아온 모든 시간의 퇴적물이 지금 너의 그 사람이야. 그러니 그분에게 감사하렴. 그 사랑의 시간이 네가 그토록 사랑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을 이루어 주었으니까.
모든 사랑은 빛나는 사리가 되어 몸의 일부가 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든 악다구니의 사랑이든. 그 시간을 지나와 지금의 내가 있다. 다시 사랑할 수 있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일부들이여, 이젠 인사를 건넬 수도 없이 우리의 시간은 멀리 흘러왔지만 어디에서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길 바라요. 그대의 지금이 아름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