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인 산문집 <아무튼 인기가요>

by 별이언니

"안녕, 나의 3분. 안녕, 나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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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들은 범우주적 평화주의자이다. 아무런 대가 없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우주의 배꼽에 핀 꽃처럼 순수하다.


의심은 많지만 잘 반하고 무언가에 꽂히면 순정을 바치는, 시인 같은 바보들이야말로 덕후에 최적화된 사람들이다. 게다가 시인들만큼 아름다운 것에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족속도 없으니 더더욱 그렇다. 환갑이 넘은 소설가 선생님도 열혈 아미로 활동하고 계시고 잘생긴 배우의 팬클럽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하는 시인들도 있다. 나도 푹 빠진 목소리가 있다. 누가 그 목소리에 위해를 가한다면 서랍 맨 안쪽에 넣어둔 비장의 뿅 망치를 들고 우주 끝까지 쫓아가 응징할, 불타는 마음이 있다.


설탕으로 만든 인형처럼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두 딸의 아빠인 시인은 오마이걸의 신자다. "예컨대 오마이걸이랄지, 가령 오마이걸이거나" 라는 신자의 열렬한 기도를 당당하게 외치는 자. 그러나 아무런 역사도 없이 갑자기 오마이걸에 꽂혔을 리는 없다. 이것이 사진인지 그림인지 아리송한, 싱크로율 백 퍼센트의 표지를 지나 그의 시간을 기웃거리면


아하, 서태지, 넥스트, 박남정, 핑클, 나훈아, 주현미 ··· 우리들의 청춘을 달궜던 노래들이 무장무장 흘러나온다. 춤 좀 춘다고 했던 아이들이 장기자랑 시간에 열을 올리던 노래들,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었던 나는 숫기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이어폰 한쪽도 빌리지 못했지만 야간자율학습 시간이 시작되기 전 쉬는 시간이면 귀동냥으로 듣던 노래들을 곧잘 흥얼거리곤 했다. 얼차려는 받지 않았지만 매는 많이 맞았던 학창 시절을 나는 어슴푸레한 노래들과 통과했다. 시인에게 몸의 일부 같은 이어폰이 있었다면 내게는 책이 있었다. 우리에게 마음을 쏟을 무엇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나 여기 있겠는가.


때로는 시인의 영혼을 구하고 때로는 매일의 절망을 견디게 하고 가벼운 피로회복제가 되었다가 시간 맞춰 찾아듣는 관성이 되기도 하는 3분의 기적. 무언가 꾸준히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오마이걸은 우리 우주의 신이다.


그가 살아온 시간 구석구석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들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여다본다. 음소거된 세상만큼 무섭고 적막한 것도 없어서 삶이 고단하고 눈물겨울 때 괜찮다 괜찮다 등을 토닥이며 함께 걸어온 노래들을. 우리는 평화로운 매일을 바라지만 그런 기적은 살아있는 무엇에게도 오지 않는 것이라 (심지어는 죽어서도 누리기 힘든 지복이 아닐까) 어떤 이는 가만히 주저앉아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어떤 이는 터지려는 마음을 펜끝에 실어 종이 위로 꾹꾹 누른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귀를 연다. 마음을 끌어안고 다독거리는 소리에 기댄다. 그러다 흥이 나면 발바닥도 비비고 힘차게 엉덩이도 흔들어본다. 펑펑 울어도 좋고 깔깔 웃어도 좋다. 이 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흔적이 남는다.


오마이걸, 이달의 소녀, (여자)아이들, 우효, 아이유, 나도 좋아하고 자주 듣는 노래들- 그러나 내 덕심은 늘 조금 부족해 야구는 좋아해도 응원하는 팀이 없다는 말에 야구의 신자인 시인에게 엄숙한 경고를 듣기도 했다. 그럼 야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딱 하나의 목소리에 빠지면서 알게 됐다. 아, 난 야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그러니 시인처럼 (아 됐고! 묻지도 말고!) 아무튼, 인기가요!라고 외칠 수는 없겠지만


기왕 공들여 추천해 준 플레이리스트가 있으니 오늘 오후엔 나의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인기가요의 유구한 흐름에 몸을 실어볼까 한다. 혹시 모르지, 해가 질 무렵 나의 우주에 오마이걸의 신이 강림하실지 -. 신나게 덩실거리며 춤을 추고 있을지도 -.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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