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앞에 열려 있는 이 시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희망의 확실함? 빨아들이는 공기가 새롭게 느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궁극적으로는 대상 없는 사랑이 초래한 이 미칠 듯한 열기, 이 터질 듯한 열기는 무엇일까?"
폭풍이 몰아치는 여름밤 열 시 반, 조그만 마을의 호텔은 만실이다. 여행객들은 복도에 담요를 깔고 불편한 잠을 청하거나 라운지에서 술을 마시며 은밀한 열기를 즐긴다. 그날 밤은 특별했다.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알몸으로 침대에서 자고 있던 열아홉의 아내를 죽이고 도주 중인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찾아 이 작은 마을을 벌써 몇 바퀴째 경찰들이 수색하고 있다. 폭풍에 발이 묶인 여행객들은 뜻밖의 살인사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나른하게 취한 마리아 역시 울렁거리는 심정으로 그녀의 눈앞에서 새로 피어나는 사랑의 조짐을 관찰한다. 친구와 남편 사이에 흐르는 달콤하고 들큼한 공기. 서로의 감정을 막 확인한 연인이 마주 보고 이름을 부르기 직전의 멀미.
마리아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찾는다. 아내를 죽이고 비를 맞으며 지붕에 숨어있는 남자를. 마리아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다. 어쩌면 그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를 차에 태워 밀밭으로 데려가 숨긴다. 밤새 지붕의 굴뚝 뒤에 숨어서 그림자가 된 남자를 기어이 찾아내서.
피에르는 다정하게 말한다. 당신, 술을 그만 마셔, 약속해. 클레르도 다정하게 말한다. 마리아, 넌 좀 쉬어야 해, 잠깐이라도 눈 좀 붙여.
마리아는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밀밭에 숨기고 남편과 친구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그를 구원하러 갈지, 버리고 갈지 선택하라고 한다. 마리아가 로드리고 파에스트라를 찾아냈던 밤, 옆 발코니에서 첫 키스를 나눈, 불안하고 죄책감에 떠는 연인들에게.
밀밭의 남자가 끈질기게 살아있었다면 피에르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아내와 친구를 죽인 남자는 스스로도 죽였다. 마리아가 잠든 사이, 피에로와 클레르는 빈 방의 문턱을 넘는다. 한 여자의 새로움으로 너에 대한 사랑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부르짖는 남편을 떨면서 바라보며 마리아는 뒤로 물러난다. 안아달라고 속삭이지만 정작 그의 품에 기대지 못하고 한 걸음씩 물러난다. 로드리고 파에스트라가 살아남아 그들의 여행에 동행했다면 마리아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사랑이 변하지 않아도 새로운 사랑은 찾아온다. 불청객처럼. 사람들로 가득 찬 호텔과 불안해서 계속 술을 마시는 친구이자 아내, 폭풍우가 몰고 온 습기, 지붕 위를 건너다니며 도망치는 살인자와 그가 죽인 어린 아내가 누워 있는 시체안치소도 이끌림을 막을 수 없었다. 마리아는 부드럽게 애원하며 더 부드럽게 도망친다. 이야기는 끝났어, 우리 이야기는 끝났어. 아직도 아내의 향긋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싶어 하는, 막 아내의 친구를 안고 돌아온 남자를 바라보며.
배신으로 사랑을 잃은 남자는 모두를 죽였고 배신으로 사랑을 잃은 여자는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들이 키스하기 전에 그녀는 그들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죄책감에 떨며 남편이 다가오면 그를 다시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랑은 존재한다. 부드럽고 멀미가 나고 불안정하고 무엇이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감정은 흰 접시 위에 올려놓자 바로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상하기 시작한다.
사랑 속에 잠긴 여자는 정작 사랑을 믿지 않는다. 갓 태어난 사랑이 이토록 심하게 부패할 줄이야.
이 모든 일이 여름밤 열 시 반에 이루어져서일까.
댄서는 춤춘다. 아내와 남편과 애인은 말없이 나란히 서서 그를 바라본다. 여름밤이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