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타 뮐러 <숨그네>

by 별이언니

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수용소에서의 기록보다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육십 년의 기록에 숨이 멎었다. 배고픈 천사가 여전히 함께 머물고 있음에, 여전히 심장삽은 있고, 세상의 모든 노동은 빵 1그램의 척도로 재어지고, 숨결은 여전히 그네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기억은 생명을 얻어 인간의 신경계를 새롭게 조직하고 그래서 이후 모든 삶이 벗어나지 못하는 수용소의 감각으로 비로소 찬란해질 수 있음에. 레오가 1-2년 차에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아마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할머니의 투명한 손을 이마에 느낄 수 있었다면, '너는 돌아올 거야' 라는 말이 아직 피흐르는 문신처럼 작동하고 있었다면. 대리아이의 출생을 알리는 어머니의 엽서 아래 한 줄의 공백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돌아갈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도 어느 정도의 희망을 하늘에 걸어둘 용기가 있는 시간이었다면. 배고픈 천사가 펄럭이는 코트와 양털 사이로 날개를 저으며 다시 하늘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뼈와가죽의시간을 너무 오래 겪으면, 한방울넘치는행복을 너무 오래 바라보면, 사람이 죽으면 정성스럽게 머리카락을 잘라 담요에 넣어 추위를 막고 찢어지지 않게 옷을 벗겨 침대에 숨기는 일을 감정의 동요 없이 하게 되면, 아무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내 기억이 곧 그리움이 되었다는 것으로 알게 되면,

이미 수용소는 트라우마가 아니다. 이미 수용소는 내 영혼의 터전이다. 나는 이미 주민이 되어, 죽은 자들 사이에 누워 있다. 등 아래 배고픈 봄이 푸르게 돋아나고 붉은 명아주와 차에 치여 죽은 들개와 멀건 양배추 수프가 둥둥 떠다니고 빵을 교환하고 또 빵을 교환하고 숨은 그네를 타고 들썩거리며 배고픈 천사가 내 옆에 머무를 때. 매끄러운 굶주림이 사라지지 않고 토요일 밤의 춤처럼 몸속을 빙그르르 돌 때.

이마 가운데 도끼를 내리쳐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거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스쳐 지나가도 그들을 묶는 것은 수용소다.

나는 수용소라고 하면 혹독한 겨울, 차갑게 얼어붙은 대지나 불기가 없는 침상을 생각했지만 레오의 수용소 풍경은 사계절이 온전하고 봄의 풍경이 도드라진다. 굶주린 자들이 푹 패인 볼에 토끼를 기르며 러시아인의 마을을 가로지를 때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에 넘쳐흐르는 봄. 나는 봄이.. 그렇게 배고픈 풍경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초록이 그렇게 허기진 색이라는 것을, 봄의 하늘이 빙빙 도는 굶주림이라는 것을.

가장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 라지만 결국 레오의 보물에는 모조리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했다'라고 적혀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어 주었던 친구가 밋밋한 겨울의 전나무를 바라보며 초록색 털장갑을 풀어 만들었던 수용소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이야기해주었을 때. 그것은 버팀목이었고 희망이었고 꿈이었지만 동시에 수용소가 이미 삶의 터전이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지독한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정착해버린 고통은 떠나지 않는다. 그건 겨울마다 쑤시는 발등처럼 지독하게 권태로운 눈으로 곁에 머물며 동반자가 되어간다. 고통 속에 머무르면서도 숨그네를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 일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Daphne du Maur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