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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Jan 24. 2024

24.1.24

난방이 효율적으로 되지 않는 집이라 올겨울엔 온수 쓸 때만 조금씩 보일러를 틀고 살았습니다. 요즘은 옷도 잘 나오잖아요. 가볍지만 따뜻한 가디건과 극세사 수면바지와 수면양말로 무장하고 전기장판과 전기난로를 켜니 견딜만했어요. 작년 겨울에도 잘 때만 보일러를 틀었는데 난방비 폭탄을 맞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난방용품들을 잘 활용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고요.

그런데 어젯밤, 잠이 깊이 들지 않고 온갖 꿈들이 찾아왔어요. 솜이불 아래 웅크리고 누워 꾼 꿈들은 꿈이라기엔 그저 옛 기억의 재생이었어요. 나는 주로 혼자 여행을 떠나는 데다 대부분 계획 없이 떠나서 관광객 필수 코스 이런 곳엔 잘 가지 않아요. 줄 서는 것도 싫어하고 식탐도 없어서 식당도 그냥 로컬 식당에 들어가 손짓 발짓으로 해결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흔히 이야기하는 어느 나라는 서비스가 나쁘다, 어느 나라는 너무 친절하다 등등에 크게 동의하지는 않는 편이지요.

일본은 가깝기도 하고 어디 가나 한글 안내가 있어 여러 번 다녀왔어요. 나는 일본인이 친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운이 나빴는지 혐한 퍼레이드도 여러 번 봤고요. 코앞에서 가면 같은 미소를 띠고 한국인 혐오 발언을 퍼붓던 사람도 만났어요. 그는 외근 중인 직장인처럼 보였는데 일본 직장인의 유니폼 같은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죠. 일본어로 동료에게 조센징 온나 어쩌고저쩌고 하며 힐긋힐긋 반응을 살피는데 토할뻔했어요. 하지만 나도 의연한 포커페이스로 가만히 있었죠. 교토에선 동네에 있는 작은 커피집에 들어갔어요. 노부부가 운영하는 커피집이었는데 처음에는 일본인인 줄 알고 흔한 일본식 환대를 하다가 어설픈 일본어 발음을 듣더니 눈에 띄게 얼굴이 굳었어요. 커피를 쾅, 하고 내려놓는데 안 쏟는 게 다행이다 싶었어요. 어쩌겠어요. 조용히 커피 마시고 커피값 테이블에 놓고 나왔습니다. 나는 혐오 감정을 품고 사는 사람을 안쓰럽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카운터 뒤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영혼이 금방이라도 휘발될까 염려하며 한 모금 한 모금 정성스럽게 커피를 마셨어요. 정당하게 돈을 내고 산 커피를 허둥지둥 마시고 싶지 않았어요. 커피는 맛있더이다. 화가 나도 장인 정신은 잊지 않으셨나 봐요. 아니 어쩌면 서빙을 담당하시던 아내 분만 한국인을 싫어할지도 모르지요. 한 잔 한 잔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리던 백발의 바리스타는 시종일관 고요했으니까요.

어제 꾼 꿈 때문에 일본 에피소드들이 줄지어 생각났네요. 다른 나라도 많아요. 여자 혼자 여행 다니면 서양 국가에서는 캣콜링은 기본이에요. 물론 친절한 사람들도 많고요. 어느 나라가 이렇다, 하는 건 없어요. 그냥 거기에도 성급한 사람, 친절한 사람, 무뚝뚝한 사람, 공격적인 사람, 다정한 사람, 예민한 사람, 겁이 많은 사람, 대담한 사람,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어요. 관광지에서 훈련된 사람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국민성이 아니에요.

어제 꾼 꿈은 몇 년 전 오사카 여행. 길을 잘못 들었는지 식당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어요. 나는 여행을 가면 가능한 걸어 다니기 때문에 그땐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어요. 겨우 발견한 식당에 환호하며 들어갔는데, 한국어 메뉴판은커녕 영어 메뉴판도 없는 정말 로컬 식당이었어요. 입구부터 단골로 보이는 분이 맛있게 담배를 피우며 식사를 하고 계시더군요. 안쪽 자리에 들어가 앉으니 아르바이트하는 여자분이 쭈뼛거리며 다가왔어요. 딱 봐도 외국인이니 주문받는 게 무서운가 보다 하면서 메뉴판을 펼치고 엄청 고민하면서 손가락으로 메뉴를 짚었어요. 뭔가 옵션이 있는지 물어보는데 차라리 일본어로 물어보면 좋겠는데 엄청나게 이상한 영어로 물어봐 알아듣지를 못했어요. 내가 응?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나 봐요. 갑자기 이 아가씨가 이이이이이잉~ 하며 울상이 되더니 가게 사장님한테 뛰어가더군요. 아기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접객을 하면서 옹알이를 하다니 내가 더 당황했어요. 가게 사장님의 팔에 매달려 뭐라 호소하는데 내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군요. 나를 때리거나 사과하거나 둘 중 하나겠군, 생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주 바라봤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해주더라고요. 편하게 주문하고 잘 먹고 나왔습니다. 너무 평범해서 좋았어요. 찾아온 손님은 내칠 수 없으니 밥은 내주지만 솔직히 일본어도 못하면서 뭐 하러 여기 왔냐는 식의 매우 평범한 사고방식. 인간답잖아요. 뭐 아르바이트생은 조금. 그런 태도는 영원히 자신을 약자의 카테고리에 가두는 것임을 알아야 할 텐데 하고 같은 여자 입장에서 안쓰럽게 느끼긴 했습니다.

새벽 토막잠에 떠오른 기억으로 어리둥절 웅크리고 있다가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저어보니 아니, 집안 공기가 차가워도 너무 차가운 거예요. 앗, 이러다가 정말 보일러 터지겠어, 하면서 뛰쳐나가 보일러를 켜고 침대로 돌아와 꿀잠을 잤습니다. 아마 추워서 잠을 깊게 자지 못해 온갖 기억들이 뇌의 표면으로 떠올랐나 봐요. 그날 나는 편하게 밥을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조금 얼어붙어 있었나 봐요.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냉기가 어젯밤의 공기와 닮아 있었나 봐요.

지구가 끙끙 앓고 있지만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면 조금은 따뜻해도 되지 않을까요. 오랜만에 훈훈한 아침, 커피 한 잔 마시며 길고 맥락 없는 일기를 남겨둡니다. 언젠가 이 글을 읽으며 어리둥절할지도 몰라요. 일기란 것은, 기억이란 것은 종종 그러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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