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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번스 <밀크맨>

by 별이언니

진정한 생존은 무엇인가. 질문했다. 세계의 표피에 잘 달라붙어 있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밀크맨>의 세계는 단호하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일조차 금기가 있다. 안전한 - 타인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안전한 - 거리가 있다. 안전한 술집이 있다. 안전한 관계가 있다. 어쩌면 - 연애관계가 있다. 위대한 경건한 여인들, 은 '어떠한 순간' 때문에 예전의 경건한 여인들이 된다. 이 작품에서 호칭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완전강간, 3/4 강간, 1/2 강간, 1/4 강간으로 범죄가 나누어지는 것만 해도 그렇다. 아무개 아들 아무개가 화장실에서 한 여자의 젖가슴에 권총을 찌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남자가 여자 화장실, 여자들이 화장을 하고 수다를 떨고 안락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공간, 을 침범한 것만으로도 그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걷어차이고 또 그 여자의 남자들에게 몰매를 맞은 후 재판정으로 끌려간다. 그렇다. 이 세계는 오로지 관습, 사람들이 완전히 무너진 내면세계를 품고 십분 거리의 건물 잔해처럼 텅 비어 있어도 삶을 질질 끌고 갈 수 있는 놀라운 억지력으로 움직인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엉뚱한 반려를 맞는 것이 당연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계.

화자는 걸으면서 책을 읽고, 반대자들의 국기가 그려져 있을지도 모르는 부품을 내기로 따는 어쩌면 - 남자친구와 오래 불안정한 연애 중이고, 안전하지 못한 장소에서 러닝을 하고, 모호한 구획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밀크맨>에게 스토킹당하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 세계의 관습과 완전한 불화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약간 들린 상태로 묘사되지만 그녀는 하늘의 색이 파란색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도 인정하지 않는다. 결혼적령기인 열여섯 살을 넘겼고 아이를 열 명 낳을 예정도 아니지만 어쩌면- 남자친구와 어쩌면-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어쩌면 - 남자친구가 이 세계와 은밀한 불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크맨>이 책을 읽으며 걷는 '나' 의 옆에 차를 붙이고 말을 건 이후로 세계는 모두 한통속이 되어 무장단체의 중요위험인물이자 아내와 아이가 있는 <밀크맨>과 '내' 가 불륜관계라고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가족마저 - 사랑하는 사람을 폭발사고로 잃고 변태성욕자 남편과 빛없는 세계에서 죽은듯이 살아가는 첫째언니는 '내'가 그녀와 똑같은 불행을 겪었다고 오해하고 기쁨으로 전율하는 표정으로 달려온다. 셋째 형부는 알약소녀가 독을 먹여서 거의 죽을 지경인 내가 자신과 러닝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오해한다. 엄마, 아, 나의 엄마는 한순간 딸이 진실을 털어놓았지만 그 순간을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 놓쳐버린다. - 지역사회의 편견과 거기 덧붙인 자신들의 불행에 가까운 망상으로 강요하고 억누른다. 여기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셋이다. 하나, 그 망상에 나도 동조한다 - <밀크맨>의 차에 탄다. 둘, 어떠한 감정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 세계를 속이자 나의 내면도 무너져 버린다. 셋, 죽는다 - 알약소녀는 내게 독을 주었지만 경건한 여인들은 내 몸에서 독을 빼낸다. 그 모든 길을 선택해보았고, 희미한 빛이 보였고, 나는 웃었지만 - 글쎄.

세계는 갱신되는가?

<밀크맨>은 죽었다. 국가는 무려 여섯 번의 오인저격을 한 끝에 <밀크맨>의 차문을 열었고 그를 쏘았다. 마침 그 전날 공황에 빠진 나는 드디어 <밀크맨>의 차를 탔다. 집단망상은 승리의 환호를 올릴 참이었다. 하지만 <밀크맨>은 죽었고, 세계는 <밀크맨> 때문에 내게 또다른 형태의 폭력을 휘두를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셋째 오빠는 달려왔다. 이제는 더이상 빛나지 않는, 알약소녀의 가련한 동생, 언니가 다섯 번이나 독을 먹여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연인에게로. 셋째 형부는 6마일을 함께 뛰는 것에 동의하고 처제가 처했던 위험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해준다. 엄마는 진짜 밀크맨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결국 인간은 완벽한 폐허가 되지 못하는 것인지 나는 더이상 걸으면서 책을 읽지 않지만 러닝은 한다. 어쩌면 - 남자친구와 쉐프는 남아메리카로 떠난다. 국경을 넘어 글로벌 볼륨댄스 챔피언이 된 어쩌면 - 남자친구의 부모처럼 여자아이들은 완벽하게 차려입고 고꾸라지며 골목에서 춤을 추고 남자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전쟁의 화염을 코를 벌렁거리며 노려보고 있다. 여전히 관습은 존재하고 감시하고 억제하는 이웃도 존재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문제여성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몰래, 어쩌면 당당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파란색, 인가? 오늘의 하늘은 은빛, 녹빛, 오래된 주화을 집어올리면 검지손가락에 묻는 구리빛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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