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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모기 Mar 05. 2024

환대의 아름다움

2024.1.10.(수) 교사연구년 사전교육 1

담임을 할 때 마음속에 명찰처럼 달고 출근하는 말이 있다. 환대. 

특히 아이들과 처음 만나는 날에는 입 밖으로 내어서까지 아이들에게 이 단어를 전한다. 

- 너희들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을 다하여 후하게 대접하는 담임이 되고 싶어.


이 말을 하는 내 등 뒤 칠판에는 아이들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있다. 칠판 가득 아이들 이름을 써 놓기 위해 나는 개학 전날 학교에 간다. 낯선 공간에 들어서는 아이들이 칠판에 적힌 자기 이름을 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따뜻해 지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따뜻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온몸에 퍼지는 부드러움이 좋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리라 믿는다. 따뜻함을 전달받은 마음이,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타인에게 비슷한 환대를 보내기를 바란다. 그렇게 세상에 온화의 잔물결이 퍼지고 퍼지기를. 


2023년 11월 24일 금요일에 연구년 최종 선발명단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겨울방학이 나가오고 있는데 12월 말이 되어도 공문이 오지 않아 궁금했다. 방학 중 41조 연수 계획을 상신하라는 안내를 전체 교사에게 하는 시점이 되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기안한 방학 계획을 결재하며 정작 나는 날짜를 어떻게 지정해서 기안해야 하나 걱정이 된다. 출장이 있다면 그 날짜를 제외하고 41조 연수 기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 속에 바쁜 학년말을 보내던 12월 28일에 드디어 사전교육 안내 공문이 왔다.




나는 정책연구이므로 10일 수요일이다. 다른 선생님들의 방학 연수 결재가 다 끝나기 전에 다행히 나의 방학 계획도 결재를 올릴 수 있었다.

 

내 인생의 특별한 한 해 2024년이 시작되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학기말 업무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1월 10일 아침부터 또 분주하다. 경기도 변방에 사는 내게 면접 장소도 연수 장소도 늘 멀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집을 나선다. 추운 날이지만 이른 아침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좋은 기분은 날씨를 감각하는 세포까지 변화시키나 보다. 면접 가던 아침과는 달리 마음이 봉봉 가볍다. 좋아하는 부드러운 팝송들을 들으며 가는 길, 긴 운전도 힘들지 않았다.  


새로 지은 교육청 건물의 광활한 지하주차장에서 조금 헤맸다. 허둥지둥 연수장소에 들어서는데 거기 '환대'가 있었다. 


공간은 따뜻하고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나를 환영한다는 문장이 있었고, 나를 위한 편안한 자리가 있었고,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명찰이 있었다. 그리고 종이가방이 놓여 있는데, 그 안에는 세심함이 담긴 음료수와 간식이 그득하다. 가방을 채우기 위해 오갔을 손과 손이 건네준 따뜻함이 고맙다. 이런 환대가 낯선 공간의 낯선 사람들 틈으로 들어서는 나의 작은 긴장까지 사르르 녹여 주었다.


오전에는 연구년 교사의 1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역시 만만하지 않은 스케줄이다. 다른 사람들은 흔히 연구년을 안식년이라 생각하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쉼보다는 공부의 한 해가 될 듯하다. 개인 연구와 공동 연구 보고서도 각각 하나씩 연구 논문처럼 작성해야 한다. 1년간 할 일이 꽤 많음을 목격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어 본다. 


점심식사가 또 좋았다. 호수가 보이는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역시나 대접받는 느낌의 밥상을 받았다. 깔끔하고 정갈하고 예쁜 것 좋아하는 내 취향의 식당이라 마음이 한 번 더 좋아진다. 


오후 시간에는 지난해에 연구년을 보내신 멘토 선배님 두 분의 강의가 있었다. 첫 번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1년이 기대되었다. 평일 낮 카페에 앉아 있는 기쁨이란 어떤 빛깔이려나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두 번째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며 1년이 걱정되었다. 대학원 논문 수준으로 쓴 보고서를 보여 주셨다. 미래의 내가 잘해 내리라 믿는 수밖에.


이후에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모둠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구 계획서의 내용을 공유하고 내용을 구체화해 나가는 활동을 했다. 정신없이 연구 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했던 터라 손질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더 많이 읽고 공부하며 연구 주제를 모나지 않게 잘 다듬어 나가야겠다.


의미 있는 연구로 밥값 하는 교사가 되어야지, 다가올 시간들을 잘 꿰고 엮어서 속이 들어찬 열매를 잘 만들어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행복한 귀가를 했다. 영하의 추운 날이지만 따뜻한 하루를 보냈다. 환대란 이렇듯 주는 순간에도 받는 순간에도 아름답다.             



덧붙임 하나, 오늘 환대의 느낌이 더 크게 다가온 것은 면접장에서의 건조함 때문인 듯하다. 그날 200명이 훨씬 넘는 우리가 모였던 공간은 무척 삭막했고 추웠다. 생수 한 병 주지 않아 목마르고 배고팠다. 오늘 같은 반전의 기쁨을 주려고 그때는 그리도 쌀쌀했던가 싶을 만큼. 극과 극의 이틀이었다. 


덧붙임 둘, 오늘 받은 안내 책자에 보니 2024 연구년 대상자가 총 190명이다. 원래 선발 예정 인원이 200명이었고, 면접에 왔던 분들이 234명이었다. 면접장까지 와서 힘겨운 면접을 같이했다가 오늘 함께 하지 못한 많은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1년을 더 잘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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