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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모기 Apr 02. 2024

가르치는 이에게 완벽히 몰입하는 교실

초급수어 첫 수업의 감동

"수업은 통역 없이 진행됩니다."


센터장님의 수어 환영 인사를 음성언어로 통역해 주신 분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그리고 교실을 나가셨다. 눈이 동그래지는 나. 옆 자리 수강생과 아는 사이라면 눈빛으로라도 의아함을 공유했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혼자서만 머릿속에 수없이 물음표를 그린다. 수어를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 원어민 수업이라니!


수어 선생님이 등장하신다. 단아하게 개량 한복을 입으신 고운 분이다. 파워포인트 화면을 띄운 채 수어로 자기소개를 시작하셨다.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교실 안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 선생님의 손짓과 커다란 표정, 옷자락 스치는 소리, 손과 손이 부딪치는 소리뿐이다. 수강생들의 시선만 분주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자동차 소리와 생활 소음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먼 곳의 소리들이 그제야 귀에 들어온다.


십여 명의 학생들은 눈을 크게 뜨고 선생님의 모든 것에 집중한다. 그녀의 손짓, 표정,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손짓과 표정의 의미를 추측해 내느라 속으로만 바쁘다.

아, 그 고요의 순간 나는 갑자기 속에서 뭉클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이건 뭐지,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눈 주변이 달아오른다. 지금 눈물이라도 흘러버리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 될 것이므로 꾹 누른다. 밀려오는 뭉클함과 젖어드는 감정을 세게 삼켰다.


센터장님이 수어로 인사하실 때부터 이미 내 감정에 묘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음 깊은 데에서 올라오는 뜨거우면서 뭉클한 울림. 나는 실제로 농인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긴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농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센터장님은 수어를 하면서 입으로 약간의 소리를 내셨다. 옆에서 남자분께서 통역까지 해주셨기에 그때는 소리가 존재했다. 그런데 수업이 시작되는 순간,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고요가 가득 찼다.


인사말을 배우고 수강생끼리 복습을 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지났다. 음성 언어가 없는 교실이지만 웃음소리는 자주 들렸다. 수어는 손가락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이 아주 중요했다. 평서문과 의문문의 수어가 같아서, 의문은 표정에 담아내야 했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의문형의 표정을 어색하게 따라 해 본다. 낯설고 왠지 부끄럽다. 움직여본 적 없는 얼굴 근육으로 어설픈 표정을 짓다 보니 서로 웃음이 터졌다. 말소리는 없고 웃음소리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교실. 따뜻했다.


눈을 봐야만 말할 수 있는 언어. 옆자리 수강생과 '안녕'을 수어로 말할 때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어색했다. 생각해 보면, 낯선 사람이라서 어색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평소에 말을 하며 상대의 눈을 그렇게 진하게 바라본 적이 있던가 싶다. 시선을 소홀히 하며 살았구나 하는 깨달음도 머리를 스친다.


첫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차 안, 마음은 포근하고 생각은 여러 갈래로 퍼진다. 수업 시작할 때 울컥했던  나 자신이 가장 궁금했다. 그 순간이 그저 너무 좋고 찡했다. 천천히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했다. 감동의 근원은 두 가지쯤 될 듯하다.

첫 번째는 농인을 처음 만나 소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감동이다. 오랫동안 배우고 싶던 언어였다. 드디어 수어로 말씀하시는 분을 만났고, 눈 앞에서 수어를 보았고, 내가 그 공부를 시작하게 되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조금 더 큰 이유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에서 이렇게 완벽한 고요가 가능하다는 데에서 오는 감동이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서로 완전히 몰입하여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 오롯이 서로에게만 집중하며 눈빛을 교환하는 그 순간이 감동이었던 것이다.


교사로서 수업하던 교실이 떠오른다. 삼십여 명 모든 학생이 아무 말 없이 교사에게 집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조용히 하자~ 조용!!!'이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고, 검지를 세로로 입술에 대고 조용해 지기를 기다리면서 간신히 한 시간의 수업을 이어간다. 아이들이 과하게 떠들면 나의 말이 꼬이기 시작하고 결국 수업은 끊기고 만다. 그러면 또 한 바탕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지 하는 잔소리를 늘어놓게 된다. 준비해 온 수업은 엉망이 되고 기분만 상한 채 한숨을 쉬며 교실을 나서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내게 이 조용한 수업 장면 자체가 감동일 수밖에 없을 터이다. 교사로서 절실히 원했던 교실 모습이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습자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하나가 되는 순간의 아름다움.


마음이 충만해진다. 기분 좋은 예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이 수업을 아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런 확신이 드는 경우는 많지 않다. 열심히 배우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퍼진다.

이 언어 공부, 첫눈에 반했고, 벌써 재미있고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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