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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모기 Mar 26. 2024

[프롤로그] 수어, 고요와 눈빛의 언어

수어라는 언어에 빠지다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궁금했다. 옆 테이블의 저 외국인은 지금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나 행복하게 웃을까. 저쪽에서 또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외국인은 무슨 얘기 중일까. 나도 그들이 쓰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그들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어들고 싶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언어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늘 신기했다. 외국어는 궁금하고도 흥미로운 존재였고 그래서 난 외국어 공부를 좋아했다.


어느 날 수어라는 언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TV 뉴스 화면의 오른쪽 구석에서 다양한 손짓과 표정으로 수어를 하시는 분을 보면서 또 궁금해졌다. 저 손짓과 저 표정은 무슨 의미일까. 뉴스는 안 보고 수어통역사만 뚫어져라 바라본 적이 많다. 궁금함은 컸으나 수어를 배우겠다는 실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미 나는 집 안팎의 일로 24시간이 가득 찬 직장맘이었고, 우리 집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뚝딱 얻을 수 있는 수도 서울에 있지 않았다. 어딘가에 가서 수어를 배울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여기며, 관심은 고이 접어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이 내게 진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흐릿하게 존재하던 수어에 대한 관심을 흔들어 깨웠다. 이길보라 작가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CODA(Children of Deaf Adults)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됐다. 책을 읽고 난 후 이길보라 감독의 '반짝이는 박수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CODA라는 외국 영화를 연달아 봤다. 모두 묵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그 후로 농인의 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와 드라마들을 여러 편 보았다. 완전한 청인 사회를 살아온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수어를 향한 갈증이 더 탱글탱글 영글어 갔다.


고조된 관심이 내 삶의 여유와 만났다. 굿 타이밍이었다. 올해 나는 낮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낮의 여유는 수어의 세계로 다가갈 기회를 의미했다.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봤다. 1946년에 설립된 한국농아인연합회라는 단체가 있고, 그 단체에서 전국 시·군·구에 200여 개의 수어통역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 경기도의 경우 대부분의 시·군에 수어통역센터가 있는 것이다. 생각보다 수어 배우기의 문턱이 높지 않음을 처음 알았고 기뻤다. 낮에 시간만 된다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수어를 배울 수 있다. 2024년 어느 날 나는 한 수어통역센터에 쭈뼛쭈뼛 찾아갔고 그렇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어는 고요함의 언어였다. 그리고 눈빛의 언어였다. 나는 세상이 빚어내는 지나친 소음과 사람들이 뱉는 너무 많은 말에 지쳐 있었다. 소란함을 유난히 싫어하는 나는 이 고요의 대화에 반했다. 물론 농인 여럿이 모여 격렬하게 수화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고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곳에 음성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말소리에 피로를 느끼던 나는 수어가 좋아졌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하고 눈을 마주쳐야만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좋았다.       

 

나는 수어라는 언어에 매료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배워보려 살그머니 발 하나 들여놓는다. 그간 전혀 만나보지 못한 세계이기에 셀레면서 조심스럽다. 이 언어를 사용하는 분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다. 나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계신 농인분들께 한 걸음 다가가고 싶다. 수어라는 언어의 다리를 건너서. 이 배움의 다리를 다 건너고 난 후 어디에선가 누구에겐가 의미 있는 쓸모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소박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나의 수어 공부가 시작되었고,

초급 수어 첫 수업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빛나는 울림을 내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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