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모기 Apr 09. 2024

공감, 말하기는 쉽고 실천은 아득하지만…

나를 수어로 이끈 책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두 번째 수업이다. 선생님께서는 본격적인 수업 시작 전 수어로 긴 이야기를 하셨다. 지난 시간에 인사말 몇 개를 가까스로 익힌 초보 수강생은 눈을 부릅떠본다. 눈이라도 말똥말똥하게 뜨면 선생님의 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으려나 싶은 마음으로. 선생님께서는 수어와 함께 '어제' 등의 단어를 입모양으로 표시해 주셔서 어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시는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수어 수업에는 눈치가 중요한가 봐 하는 생각도 머리를 스친다.

선생님은 마치 팬터마임을 하는 배우 같다. 큼직큼직한 동작, 얼굴 근육을 다양하게 움직이며 짓는 표정이 굉장하다. 온몸으로 말을 하시는구나. 선생님이 보여주신 모든 것을 종합해 추측해 보면, 어제 길을 걷다가 무슨 일인가가 있었고 듣지를 못해서 넘어지며 다쳐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다는 내용인 듯하다. 긴 이야기는 선생님의 찡그린 슬픈 표정으로 끝이 났다. 나도 덩달아서 삐죽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듣지 못함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얼마나 많을 것인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어렵다.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공감이었다. 특히, 작고 여리고 약한 존재를 향한 공감의 소중함을  다양한 수업을 통해 전하려 노력했다. 공감은 배려를 낳고, 역지사지의 마음을 낳고, 평화를 낳아, 결국 이 세상이 더 좋아지는 데 기여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몸이 불편한 분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어려움을 공감하려 노력하자고 아이들에게 일렀다. 선생님은 비교적 공감 능력이 뛰어나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이 별로 없더라 하는 말도 덧붙였던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를 이야기이지만...


그런 내게 책 하나가 훅 들어왔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이다.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 되고픈 내게 착각하지 말라고 뾰족하게 말하는 듯하여 마음이 쪼그라든다. '저기,,, 저, 저는 공감을 중시하는 사람인데요,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교사인데요,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이 왜 착각일까요..?'라는 질문을 소심하게 품은 채 책을 주문했다. 착각의 대상이 '고통'인 건지 '공감'인 건지 어느 단어에 방점을 찍어 제목을 해석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책을 기다리며 새삼스레 공감의 뜻도 검색해 봤다. 사전에는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란다. 공감(共感)의 한자를 뜯어보니 '한가지로 느낀다'는 의미이다. 감정이 하나가 된다는 것. 이런,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나는 너의 감정, 의견, 주장에 공감해!'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실제로 타인과 똑같은 마음, 하나의 마음이 되어 느낀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그건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내가 여태 말해온 공감이란 것도 공허한 선언에 불과했던 게 아닌가 싶은 반성이 스르륵 돋는다.


이길보라 님에 대해 내가 아는 정보는 한 줌이었다. 고등학교 자퇴하고 혼자서 동남아 몇 개국 여행했다는 것. 다큐영화를 찍고 글을 쓰는 분이라는 것 정도. 책을 읽고 가장 크게 얻은 정보는 이길보라 작가가 CODA(Children of Deaf Adults)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코다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처음으로 농인의 세계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책을 다 읽자마자 부랴부랴 이길보라 작가가 찍은 다큐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를 보았다. 그리고 수어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했다. 농인의 세계를 뒤늦게 알게 됐지만 더 많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듯이 수어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 대한민국에서 수어가 공용어처럼 사용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청인과 농인이 서로 불편 없이 소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을 넘어서라"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와 르포 에세이 문학을 지도 삼아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익혀왔다. 좋은 작품들은 다름과 상실, 고통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고통을 납작하게 바라보기보다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가치를 배웠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을 넘어설 때 비로소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시각이라고 믿는다."라고 작가는 씩씩하게 말했다. 이 책은 납작하게 세상을 이해하지 않도록 수많은 책과 영화를 발판 삼아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멋진 작가이다.

그래 세상의 모든 것은 단순하지 않지.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단정하고 일반화하지. 작은 정보로 세상을 다 아는 듯 말하지. 납작한 이해를 경계해야 한다는 말 앞에서, 내가 수업 중 말한 '공감'은 당당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고통과 상실에만 집중할 때 불편함을 느낀다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책과 영화에서 본 작가와 작가 가족의 삶은 당연히 고통만 있지 않았다. 누구의 삶이든 그러하듯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슬프게도 기쁘게도 존재하고 있었다.


수어 선생님이 온몸으로 하는 말을 이해하려 눈을 반짝였던 순간이 선명하다. 나는 어떻게든 내용을 알아차리고 싶었다. 선생님이 살며 겪는 고통과 상실만이 아니라 더 많고 다양한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었다. 선생님이 느끼는 감정의 결을 알아 나도 같은 감정의 선상에 서고 싶었다. 수어 공부는 청인 세상을 사는 내가 농인 세상을 조금 더 두텁게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징검다리가 되리라 믿는다.

누군가가 '네가 말하는 공감은 너만의 착각이야!'라 말한다 하더라도, 나는 앞으로도 공감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전적 의미를 생각하면 완벽한 공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감하기 위한 '노력'은 가능하다. 나는 변함없이 공감하려 '노력'하는 인간이 될 것이고, 학생들에게도 공감하려 '노력'하는 어른으로 자라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단순하고 납작한 착각이 아닌 섬세하고 널따란 이해를 하려 노력하는 것은 어쨌든 소중하니까. 공감의 가치는 여전히 빛나니까.


나는 내일도 기초수어를 배우러 간다. 왕복 두 시간의 먼 등굣길이지만 오가는 내 발걸음은 신이 날 것이고 마음은 명랑할 것이다.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by 이길보라, 2023, 창비



이전 02화 가르치는 이에게 완벽히 몰입하는 교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