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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모기 Apr 16. 2024

소리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 그 경계에 서서.

영화 <코다>의 루비를 생각하며

내 딸이 학교에서 합창 공연을 한다. 많은 아이들 중 내 아이만 유독 빛난다. 언제 저렇게 훌쩍 커버렸나 마음속에 뭉클한 감동이 퍼져 나간다. 합창이 끝난 후 무대에 딸과 한 남학생만 다시 등장했다. 둘이서 듀엣으로 노래한다. 내 딸의 입 모양, 얼굴 표정, 손짓과 몸짓 모두 너무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저 아이가 내 딸이에요, 네네 제가 저 예쁜 아이의 엄마랍니다”라며 자랑하고 싶어 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관객들이 내 아이의 노래에 흠뻑 젖어있다. 공연장 가득 부드럽고 따뜻한 공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나와 내 남편과 아들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적막이다.


영화 속 이 장면에서, 들을 수 있는 나는 주인공 루비 엄마의 마음을 감히 상상해 본다. 하지만 경험한 적 없는 세상이므로 나의 상상은 폭이 좁다. 그 순간, 영화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영화 화면은 흘러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적막이다.

나는 '헉' 하고 놀랐다. 이것이구나! 들리지 않는 그들의 세상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루비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둘의 화음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데, 가사는 얼마나 낭만적이었는데, 소리가 사라지니 입을 벙긋거리는 루비의 모습만 남을 뿐이다.

사람들은 박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 짓거나 눈물을 흘리는데 듣지 못하는 루비의 가족들은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루비의 노래를 바라볼 뿐, 그저 공연의 분위기를 상상할 뿐. 그 아득함을 이제야 알겠다.

영화에서 뮤트의 시간은 1분여에 불과했지만 내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을 통해 상상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농인의 세계를 강렬하게 체험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명장면이었다.


영화 <코다(CODA)>는 2021년에 개봉된 영화이다. 그리고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조연상, 각색상을 수상했다. 내게 21년 22년은 코로나가 한창인 일본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지상과제였던 시기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영화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24년 초에 이길보라 님의 책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을 읽으며 코다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에야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도 넷플릭스 영화 코너에서 제목을 보았을 터이지만 코다가 뭔지 모르는 무식자의 눈에 이 멋진 영화는 의미 없이 스쳐갔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실의 재발견을, 그리고 조금 덜 무식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재다짐을 했다.


<코다>의 주인공 루비는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이다. 부모님과 오빠 모두 농인이고 루비만 청인이다.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집안에서 루비는 통역사의 역할을 하며 산다. 부모님이 병원에 갈 때도, 잡은 물고기의 가격을 흥정할 때도, 부모님이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도, 어업조합 회의에 참석할 때도 루비의 통역이 꼭 필요했다. 루비는 통역을 위해 늘 뛰어다녔고, 새벽에 고기잡이 배에 올랐던 피곤함으로 학교에서는 엎드려 잤고, 친구 몇몇으로부터는 생선 비린내 난다는 놀림을 받았다. 그래도 다행히 씩씩하고 강한 모습으로 살아내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아,, 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마음이 아렸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의 입과 귀 역할을 했을 터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삶의 끝이 언제일지 기약할 수도 없다. 가족에게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빨리 오라고 루비를 재촉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루비만의 꿈과 인생은 어디에 있는 건가 싶어 안타까우면서도, 루비의 아빠 엄마 오빠를 생각하면 루비 없는 상황은 너무나 막막하다.


돌보는 이의 고단함을 생각한다. 음성언어 중심의 세상에서 농인 가족을 돌봐야 하는 코다가 짊어진 무게를 생각한다. 대 여섯 살 먹은 아주 어린 루비가 단풍잎 같은 손가락으로 수어를 하고, 엄마 아빠의 수어를 이웃사람들에게 아직 여물지 않은 발음으로 전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돌봄을 받아야 하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돌볼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모든 코다들이 아프다.

내가 수어를 배우겠다고 생각한 이유, 조금 더 많은 이들이 수어를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인들이 조금 더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청인들이 농인의 언어를 배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농인을 위한 더 많은 사회적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하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TV 화면 한켠에 수어통역사가 등장한 것이 고맙다. 영상에 자막 기능이 있어 고맙다. 농인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반갑다. 영화 <코다>의 주인공을 실제 농인이 맡은 것이, 그리고 루비의 아빠 역할을 맡았던 농인 배우가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조연상을 탄 것이 기쁘다. 그의 수어 수상 소감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그와 함께 내 마음도 울었다.


영화 <코다>의 영화 포스터를 살펴보았다. 라라랜드의 음악감독이라거나 최고의 음악영화라는 말로 영화를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홍보 문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줄은 '들리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그 경계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말이었다. 수어통역사이기에 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들리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의 경계인인 루비의 삶이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아서 영화 내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결국은 루비가 자신만의 인생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야기가 맞다. 루비 가족 역시 루비의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삶을 잘 헤쳐 나가리라 믿는다. 루비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아빠 오빠 셋이서도 잘 살아왔던 것처럼. 언제나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명랑한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들과 루비가 헤어지며 서로 "I LOVE YOU"를 수어로 말하는 장면이 아주 오래 뜨겁게 내 마음에 남았다. 멋진 가수가 될 루비에게, 루비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음으로 들어줄 루비의 가족에게, 아울러 여전히 거친 길을 걷고 있을 세상의 모든 농인분들께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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